• 입력 2004.09.02 17:05

불맥이제(祭)의 유래

함평읍에서 서북쪽으로 14km를 가면 함평만(灣) 갯가에 대전리라는 마을이 있다. 이 마을은 동북에 노승산을, 북쪽에 군유산을 두고 있다. 읍에서 이 마을에 접어들어 10리쯤 거리에 ``옷밥골재``라는 고개가 있는데 이곳을 식의동(食衣洞)이라고도 한다. 이곳은 산남리에 속하는데, 산으로 둘러싸인 좁은 골짜기지만 물이 좋고 땅이 기름져 흉년이 드는 일이 없기 때문에 옷과 밥은 걱정하지 않는다 하여 ``옷밥골``이라 불리었다고 한다.

대전리는 수문(水門 수무이), 대행(大行)과 면소재지의 저전(楮田)을 합하여 부르는 행정리 이름이다. 이중 수문마을의 남흥동 북쪽에 ``중울음재``가 있어 재미나는 민속이 전해오고 있다.

옛날 어느 노승이 함평에서 옷밥골재를 넘어와 좋은 절터를 찾고 있던 중이었다. 마을 뒤를 둘러싼 산의 형세가 좋아 보이므로 무릎을 치면서 좋아했다가 자세히 지형을 살피더니 앞산마루에 화귀(火鬼)가 서려있고, 저수지 동쪽의 뒷산 형국이 나빠 명당을 망쳤다고 탄식했다. 노승산으로 올라가는 재에 이르러 앞산마루를 쳐다보고 다시 계곡을 내려다보면서 엉엉 울었다고 한다. 이후부터 이곳을 ``중울음재``라고 부르기 시작했으며 이 고개가 바로 노승산에 오르는 수문마을 뒷길이다.

이같은 지리때문에 노승은 이곳에서 절터 찾기를 포기했다. 돌아서려던 노승이 마을을 내려다보더니 마을의 한 노인에게 ¨이 마을은 계속 번창할 것이나 화재가 많은 것이 염려되고 계곡에서 자살하는 사람이 많이 나올 것¨이라고 알려 주었다. 이 말을 들은 노인이 노승에게 애원하며 그 액맥의 방법을 물었다.

마을 건너편을 가르키며 노승이 말하기를 ¨저기 보이는 수문 위의 산마루에 커다란 항아리를 묻고, 그 항아리에 바닷물과 우물물을 반반씩 흙을 덮어서 무덤처럼 해두었다가 불이 나거든 열어 보라¨고 했다. 이 말을 들은 노인은 마을 회의를 열어 이 사실을 모든 사람들에게 알렸다. 물항아리를 사오는 일은 ``웃대미마을``에서, 뚜껑을 만드는 일은 ``아랫대미마을``에서, 항아리를 묻는 일은 ``동그대미마을``에서 맡기로 했다. 항아리를 묻는 날은 정월 대보름 당제가 지나고 좋은 날을 가려 하기로 했다. 이때부터 불을 막는다는 뜻의 불맥이제 풍속은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뒤부터는 불이 나는 횟수가 적어졌으나 중간마을(동그대미)에서 불이 나 열어보니 가운데 항아리만 물이 말라 있었다. 아무리 살펴봐도 깨진 곳이 없었다. 다시 물을 채우고 묻어 두었으나 아랫마을에서 불이 나 열어보면 다시 아랫쪽항아리만 물이 없어져 있었다. 윗마을에서 불이나 열어보면 역시 윗항아리만 물이 없어져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비로소 동쪽의 제일 윗항아리가 ``웃대미마을``것이고, 가운데 것이 ``동그대미``것이며, 아랫것이 ``아랫대미``것임을 알게 되었다. 이중의 항아리 물이 없어지면 그 항아리와 관계되어진 마을에 불이 난다고 믿게 되었다.

그 뒤부터 음력 2월 1일 오전에 정결한 제주를 골라 제를 지내고 농악을 울리며 물항아리를 열어보았다. 물이 없어진 항아리가 있는가 살펴보고 물이 많이 줄어든 항아리는 미리 준비한 바닷물과 우물물을 반반씩 섞어 채웠다. 그 마을은 특히 그 해에 화재를 조심하도록 경고했다. 특히 이 날은 제물을 많이 마련해 이곳을 지나는 행인들에게까지 음복을 시키며 큰 잔치를 벌이기 때문에 마을의 행사로는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 항아리는 옷밥골재를 지나 장터마을로 접어드는 길목 우체국과 야산이었던 이곳에 지서가 들어서고 밭으로 개간되면서도 물항아리가 묻힌 8평가량은 그대로 남아있다. 각각 넉되들이로 1m간격으로 묻혀 있으며 물을 채운 뒤 석판으로 뚜껑을 씌우고 항아리와 석판뚜껑 사이는 진흙으로 메웠다. 그 석판 위로 70cm가량 흙으로 덮어놓고 있다.

마을 뒷산 계곡에 있는 낭떠러지에서는 사람이 떨어져 죽거나 병신이 되는 일이 많았다. 사람뿐만 아니라 짐승들도 산을 넘어서 마을로 들어오다 낭떠러지를 쳐다보고 겁을 집어먹고 도망가기도 했다.

이곳에는 사슴이 넘어졌다는 ``도록(倒鹿)골``과 노루가 넘어졌다는 ``도장(倒獐)골``이 있다. 불맥이제가 있던 어느 해에 이곳 낭떠러지 입구를 막아 사람의 통행을 금지시켜 명당의 흠이 되는 두 곳을 막은 셈이 된다.

이 마을이 수문이라 불리게 된 것은 간척공사가 되기 전에는 바닷물이 들어오는 수문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곳의 지형은 숨은 신선이 글을 읽는 은선독서형국(隱仙讀書形局)이라 하여 은곡이라 그 이전부터 불려 명당의 자리였음을 알 수 있다. 불조심을 생활화 했던 옛 모습이 전설과 곁들여 동제(洞祭)가 되니 좋은 본보기요 민속의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