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입력 2004.08.18 17:05

문씨(文氏)

문헌에 131본으로 나와 있으나 1985년 경제기획원 조사통계국 조사 자료에 의하면 43개 본 88,957 가호 375,866명으로 전국 씨족 순위 23위를 차지하고 있고 100호 이상인 본은 남평 82,069호, 감천 2,838호, 정선 1,811호, 강성 279호, 함평 158호, 파평 153호, 단성 121호, 양평 107호의 9개 본이다. 함평군에는 1969년 조사에서 남평문씨 193호, 문화 1호로 2개 본이 살았고 1985년 조사에서는 가호를 이루고 사는 본이 남평 176호 743명, 정선 3호 13명의 2개 본이고 가호를 이루지 않고 사는 본이 감천 4명, 함평, 나주·안동·능성이 각 1명으로 5개 본, 합하여 7개 본이 살고 있다.

감천(甘泉)문씨의 시조는 원길(原吉)인데 그의 선대는 경주김씨였다고 한다. 그런데 선대에서 중국에 들어가 문장으로 이름을 날려 문(文)성을 사성(賜姓) 받았으며 정선(旌善)문씨 역시 원래는 전씨(全氏)였으나 감천문씨와 같이 중국에 선대가 들어가 문장으로 이름을 날려 사성되었다고 한다.



■남평문씨(南平文氏)

시조는 다성(多省)이다. 그의 출생에 대해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나주시 남평면에 장자지(長者池)라는 못이 있고 그 못가에는 큰 바위가 솟아 있다. 신라 자비왕 15년(慈悲王, 472) 2월 장자지에 자색의 서기가 있어 왕이 현주(縣主)를 시켜 살피게 했더니 못가에 있는 바위에 5색 구름이 감돌면서 아이의 울음 소리가 들렸다. 사다리를 가져오게하여 바위에 올라가 보니 돌로 만든 궤가 놓여 있고 그 속에 갓난아이가 들어 있었다. 또 함면(函面)에는 “文”자가 쓰여 있었다. 왕은 하늘이 나를 돕기 위해 보낸 것이라 기뻐하며 문씨(文氏)로 사성하고 궁중에서 기르게 하였다.

이 아이는 나이 불과 다섯에 문무가 출중하였고 사물의 이치를 스스로 깨달았기 때문에 “다성(多省)”이란 이름을 지어 주엇다. 그는 지증왕 1년(智證王, 500)에 중시아찬(中侍阿?)이 되고 진흥왕 1년(진흥왕, 540)에 대국사(大國師), 진지왕 2년(眞智王, 577)에 대아찬 대국사가 되어 식읍 3천호를 받았다. 후손들이 그가 태어난 남평을 본관으로 하였으며 높이 6m쯤되는 장자지의 바위에 “문암(文岩)”이란 비를 세워 시조의 강탄처(降誕處)로 기념하고 있다. 그런데 남평은 660년대까지 엄연히 백제 땅이었는데 이 전설에 472년 신라 땅인양 엮은 것은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 대목이다.

함평에 살고 있는 파는 경숙공파(敬肅公派), 참의공파(參議公派), 순평군파(順平君派) 목사공파(牧使公派) 순으로 많이 살며 1985년 조사에서 176호 743명이 살고 있어 함평군 본관별 씨족 거주 순위 25위를 차지하고 있다. 함평군에 제일 먼저 입향한 파는 순평군파며 시조로부터 24세손인 명희(命羲)가 1600년경 나산면 삼축리 분토동에 이거 정착하였고 다음으로 참의공파인데 시조의 24세손 상주(尙周, 1676~1740)가 1700년경 무안에서 함평읍 옥산리로 들어왔다.

경숙공파는 시조로부터 39세손인 백(伯)이 순조 때인 1800년경 나산면 구산리 냉천동에 자리를 잡았고, 함평읍 옥산리에 참의공파, 나산면 삼축리 분토동에 순평군파, 함평읍 만흥리에 경숙공파, 엄다면 학야리에 목사공파가 집성촌을 이루고 살고 있다. 입향조 명희의 묘소는 나산면 삼축리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