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입력 2003.02.12 17:04


함평 사람들의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는 곳을 찾는다면 유교정신이 깃들어 있는 향교, 서원·사우, 누각과 정자 등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이들 유적들은 함평 선비들의 정신적 기저인 나라 사랑하는 마음과 부모 공경의 얼이 유적 곳곳에 배어 있다.

향교는 유교이념을 보급하고 지방민을 교육, 교화하기 위하여 일읍일교(一邑一校)의 원칙에 의해 모든 군현에 존재하던 조선시대 이 지역 유일의 관학(官學)이었다. 따라서 향교는 조선초기부터 국가의 각별한 보호와 관심을 받아왔었다. 이 지역 유학의 상징으로, 유일한 관학으로, 또는 양반들의 향촌 기구로서 그 역할을 해 왔던 것이다.

서원·사우는 그 건립활동과 관련하여 지방의 사람 세력들이 그들의 세력권 형성과 세력권을 유지·강화시키기 위해 각각의 명분과 이해관계를 반영하는 유적이다. 이는 서원·사우가 이 지역 기득권층의 권위기구로서 향촌사회구조의 변모와 특징을 밝혀주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는 뜻이다. 예컨대 배향인물에 관한 자료는 문중기반의 성장과정과 관계되어 배향과정·추배시기·인물성격 등에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단순한 원·사의 문제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향촌사회구조의 시대별 변화상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함평지역에 건립되었던 서원·사우는 『전남의 서원·사우』Ⅱ(1989)에 의하면 약 40개소로 파악되고 있다. 이는 다른 지역에 비추어 볼 때 상당히 많은 서원·사우가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가운데 1910년 이전에 건립된 서원·사우는 20개소에 이른다. 함평의 서원·사우 중 국가에서 사액을 받은 유적은 자산서원 1개소뿐이다. 주자와 송시열을 배향하였다는 자양서원을 제외한 나머지 대부분은 후손이나 문인들에 의해 건립되었다. 여기에서는 우리나라 당파싸움의 부산물이었던 자산서원과 함께 『전고대방』·『서원가고』·『서원등록』등 옛 문헌에 기록되어 있으면서도 유적이 남아 있는 증산사와 사산사가 있다.

누각과 정자는 줄여서 루·정이라고도 부른다. 누각과 정자는 우리나라 어디를 가든지 도처에 분포하고 있다. 누각과 정자는 가족집단의 생계를 유지하며 살아가는 마을속의 살림집과는 달리 자연을 배경으로 한 남성위주의 집회나 휴식공간으로 활용되던 장소였다. 또한 전근대사회에 있어서 교양인들의 지적 활동의 장소로 상층지배계층의 문화가 구체적으로 발원되는 장소이다. 누각이나 정자를 중심으로 이런 저런 인연을 가진 교양인들이 모여서 시담을 읊조리거나, 시국담이나 경륜을 술회하였으며, 향리의 자제들에 대한 교육을 수행하고, 또는 은둔하면서 학업을 닦기도 했다. 그리고 이 지역 사림 세력들의 향회 집회소로 사용되는 등 특정 사회세력의 분파적 집회소로 활용되기도 하여 그 조직의 성원과 목적에 따라 구성원의 이해와 결집력이 강하게 드러나는 유적이다.

함평의 누각과 정자는 전남대학교 호남문화연구소가 1987년에 조산한 <전남지방의 누정조사연구(Ⅳ)>∼목포·무안·함평·영광∼(『호남문화연구』제17집)에 따르면 현존하는 루·정이 80건, 현존하지 않는 루·정이 66건 등 146건으로 조사된 바 있다. 이 수효는 화순과 나주 다음으로 그 분포 수효가 많은 것으로 유유자적하던 함평인의 풍류생활을 보여주는 내용이며 1910년 이전에 건립된 함평의 누각과 정자 가운데 대표적인 영파정과 이인정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