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입력 2002.03.12 17:04

장이길 선생(張以吉 1529∼1595)



선생의 본관은 흥성이고 호는 乙溪(을계) 또는 野憂(야우)이다. 중조 英(영)의 8세손이며 俔(현)의 아들로 야우공파의 派祖(파조)가 된다.

선생은 6세때 이미 문리를 해득해 향리 사람들이 신동이라고 불렀고 栗亭 崔鶴齡(율정 최학령)의 문하에서 수업하고 1555년(명종 10년)에 생원과에 급제해 承仕郞(승사랑)과 通仕郞(통사랑)을 지냈다.

그후 32세이던 1560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吏曹 出身(이조 출신), 1562년 司憲府 持平(사헌부 지평), 1564년 宣武郞(선무랑)으로 승진해 성균관 學諭(학유)와 南學訓導(남학훈도)를 역임했다.

또한 1573년 長城 縣監(장성 현감), 1575년 平壤 庶尹(평양 서윤)과 宗簿侍 僉正(종부시 첨정), 1576년 益山 郡守(익산 군수), 1581년 吏曹 正郞(이조 정랑), 1583년 사간원 大司諫(대사간), 1588년 珍山 郡守(진산 군수), 1591년 승정원 右承旨(우승지)에 임명된다.

선생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昭義將 林公 (소의장 임공권)과 더불어 의병을 모아 의병장 金千鎰(김천일), 趙憲(조헌)을 적극 찬조하고 의주까지 임금을 호종하였다. 또한 조정 대신들이 명나라로 피신해야 한다는 의견을 보일 때 "남으로 巡狩(순수)하여 국토를 회복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려 임금의 신임을 받기도 했다.

1594년 公洪道 觀察使(공홍도 관찰사), 1595년 이조 참판 겸 五衛都摠管(오의도총관)에 올랐고 같은 해 9월 28일 세상을 떠났다.

선생은 1580년대 나주시 다시면에서 아내 심씨의 고향 근처인 신광면 계천리 사천으로 이주해 흥성 장씨 함평 입향조가 됐다. 아내는 陽城(양성) 이씨 판관 成憲(성헌)의 딸로 생육이 없고 또다른 아내는 청송 심씨 司導侍正(사도시정) 安坪(안평)의 딸로 3남 2녀의 자녀를 두었다. 또한 양성 이씨를 아내로 맞이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