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입력 2023.04.26 10:57

1월달에 부임해 와 폭설과 한파의 겨울을 보내고 꽃피는 춘() 사월 봄을 맞이하고 있다.

 

함평교당 부설 노인요양원에서 3월 말에 돌아가신 할머니 어르신 천도재를 모시고 있는데 마침 함평군민 행복을 위한 조찬기도회 겸해서 생화(生花) 꽃꽂이를 하려하게 해 놓아 꽃속에 파묻힌 영정(影幀) 속 할머니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 보호자에게 전달해주었다.

 

원불교 교당에서 돌아가신 어머니를 위해 천도재를 지내주고 있다고 하자 보호자는 크게 기뻐하며 고맙다고 하면서 이 사실을 동네 할머니들에게 소문을 내었고 경로당에 다니는 원불교 교도님이 필자에게 전화를 해왔다. 할머니들 틈에서 전화를 하시는지 주변이 시끄러웠다.

 

교무님 꽃값이 얼마예요?” “! 무슨 꽃값요?” “아니 교당에서 꽃을 많이 꽂고 재를 지낸다면서요?” “무슨 재요? 아 요양원에서 돌아가신 할머니 천도재요? 원불교 요양원에서 돌아가셨기에 재를 재내드리고 있어요. 돈을 바라고 하는 것은 아니고요. 원불교 시설에서 돌아가셨으니 당연하게 해 드리는 것입니다. 혹시 종재식때 시간이 되면 보호자 가족들 참석할 수 있도록 안내 좀 해주세요." 하고 전화 통화를 마쳤다.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80살 먹은 할머니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나도 죽었을 때 누군가가 예쁜 꽃으로 치장하여 천도재를 지내준다면 이보다 더 황홀한 순간이 있을 것인가" 하고 할머니들은 생각했을 것이다.

의도는 하지 않았지만 결과론적으로 원불교 요양원 시설에서 돌아가시면 화려한 꽃으로 49일간 천도재를 지내준다는 사실이 할머니 어르신들 사이에 큰 이슈가 되었지 않나 싶다.

 

죽음은 존엄하다. 누구나 태어나면 한번은 가는 의식이 죽음이다. 가난한 자나 부자를 막론하고 누구나 죽는다. 죽음에서 자유로울 자 없다. 나의 마지막 가는 길을 꽃으로 장식하고 천도(薦度)의 길을 안내해 준다면 이보다 더 행복한 죽음이 있겠나 싶다.

 

원불교 교조 소태산 박중빈 대종사(1891~1943)는 자기보다 먼저 열반한 제자에게 친히 천도법문을 내리며 당부했다. “죽음은 숨을 내쉬고 들이쉬는 것과도 같고 눈을 떳다 감는 것과도 같고 아침 해가 저녁에 지고 다음날 다시 뜨는 것과도 같아서 이쪽에서 저쪽으로 옮겨가는 변화는 될 지언정 태어나고 죽는 것이 아니니 사랑하는 마음, 욕심내는 마음, 원망하는 마음을 내려놓고 깨끗하고 맑은 한 마음을 챙겨 새로운 인연 따라 새로운 마음으로 사람의 몸을 받아 성불제중(成佛濟衆)의 삶을 살으라고 말이다.

 

마침 함평나비대축제 기간이다. 나비는 2번 태어난다. 알로 태어난 이후 번데기를 거쳐 화려한 날개짓으로 변화한다. 애벌레로 유년(幼年)을 보내고 하늘을 날아가는 성체(成体)로 완성된다. 삶이 유년이라면 죽음은 성체가 되고 다시 죽음이 유년이라면 삶은 성체가 된다. 이렇게 삶과 죽음은 두개 같지만 하나이고 하나이면서 두개가 된다.

 

나비가 두 번 태어나듯 나비 축제의 고장 함평지역에 새로운 성장 동력이 태동하길 기원한다. 지방소멸을 말하지만 교통 통신의 발달로 경쟁력 있는 곳은 전 세계에서 찾아들지 않는가? 함평(咸平)의 뜻과 같이 꽉 차서 상하좌우로 공평한 대동(大同) 세상을 추구한다면 세상의 이목이 집중되어 사람들이 함평으로 모여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