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입력 2014.01.21 11:17

<강경호 시인의 추억의 창-20>

(시인, 문학평론가)
옛날부터 마당은 공동체적인 삶을 구현하기 알맞은 공간이었다. 여름엔 마당에 멍석을 깔고 저녁밥을 먹고 누워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곤 하였다. 집안의 대사인 혼례 치루는 일은 물론 어른이 돌아가시면 차일을 치고 문상객을 맞고 장례를 치뤘다. 팔월 한가위엔 동네 처녀들이 모여 강강술래를 부르며 빙글빙글 마당을 돌았다. 정월 보름날엔 농악패들이 한해 농사를 기원하고 집안의 안녕을 빌었다. 마당은 다목적 삶의 장소였던 것이다. 그래서 마당놀이라는 것을 하면서 온 가족과 마을 사람들이 흥에 겨워하기도 하고 슬픔을 나누기도 했던 삶의 고처였으니 마당이라는 말을 그냥 공간개념으로만 이해할 것이 아니다.


그 마당에서 농산물을 타작을 하고 건조시켰는데 멍석을 깔고 고추를 말리는 풍경은 이제는 아릿한 옛 풍경이 되어가고 있다. 나는 마당에서 아버지가 마른 콩대를 널어놓고 도리깨질하는 소리를 가끔 떠올린다. 지금은 남의 집이 되고 남의 마당이 되었지만 눈을 감으면 젊은 아버지께서 땀을 뻘뻘 흘리며 콩타작을 하는 도리깨질 소리가 들린다.


오늘날 같으면 마스크라도 쓰고 도리깨질을 했겠지만 그 시절에 아버지는 도리깨질을 하시다가 힘겨우면 냉수를 한 대접 벌컥벌컥 들이키고는 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닦고 다시 도리깨질을 하셨다. 학교 갔다가 집에 돌아오면 우리 집 마당 위에서 도리깨발이 춤을 추곤 하였다. 하늘로 오르락내리락 할 때마다 콩대를 두들기는 소리가 ‘탁 탁 탁’ 소리를 냈다. 집 마당에 들어서면 도리깨발을 맞은 콩깍지가 토해내는 콩알이 ‘툭 툭’ 사방으로 튀었다. 마당 옆 변소간 벽을 맞고 구르는 콩알, 문풍지를 맞고 마루를 굴러 마당으로 떨어지는 콩알, 마치 새총에서 튕겨나간 새총알처럼 집안 구석구석으로 튕겨갔다. 어떤 때는 학교에서 주머니에 손을 넣으면 어떻게 들어갔는지 콩알이 손에 쥐어지기도 하였다.


나중에 콩 타작이 끝나 수북하게 쌓여있는 콩알들을 보면 괜히 부자가 된 기분이었다. 열심히 농사지어 소출한 탐스럽고 영근 콩을 보는 아버지의 마음은 도리깨질의 힘겨움도 잊고 넉넉한 마음이었을 것이다. 우리 집에서는 둥그렇고 누런 메주콩을 많이 심었는데 열두 식구가 한 해 동안 먹을 된장과 장을 만드는데 쓰고 나머지는 읍내 장에 내다 팔아 가용에 썼다. 콩은 요긴하게 쓰였는데 메주뿐만 아니라 쑥떡 고물로 사용하면 그 구수한 맛과 향기가 코를 즐겁게 하였다.


타작을 하고 남은 콩대는 아궁이에 넣고 불을 지피면 아주 모질게 잘 탔다. 타다닥 소리를 내며 불쏘시개가 된 콩대에서 가끔 콩이 튀어나오기도 하였다.


아버지는 해마다 겨울이면 산에 가서 도리깨발로 쓸 나무를 베어오셨다. 그 재료가 어떤 나무인지는 잘 모르지만, 쉽게 부러지지 않는 어린 나무였는데 곧고 낭창낭창 잘 휘어지는 것을 골랐다. 그런 나무들을 새끼줄로 여러 개를 꽁꽁 묶어 헛간에 걸어놓으면 겨우내 알맞게 건조되어 단단한 도리깨발 재료가 되었다. 봄날 아버지는 미리 베어다 놓은 대나무에 구멍을 뚫고 나무 고리를 끼어 도리깨발과 결합하여 도리깨를 완성하셨다.


아버지는 도리깨질 할 때는 힘들었겠지만 당신의 품안에서 자라는 어린 눈망울을 떠올리며 신명나게 콩타작을 하셨을 것이다. 고통스럽고 모진 세상을 헤쳐나가며 누군가 낙신낙신 두들겨 패주고 싶을 때 온 힘을 풀어 애꿎은 콩을 두드렸을 아버지의 생각이 배어있을 것 같은 도리깨가 오늘은 어쩐지 내 종아리를 때리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