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입력 2014.01.21 11:09

<강경호 시인의 추억의 창-17>

강 경 호
(시인, 문학평론가)
오늘날에는 유치원에서부터 문자교육을 시키는 터라 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글을 터득한다. 그러나 나의 유년시절엔 유치원이라는 말을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다. 그러므로 시골에서는 초등학교에 바로 입학하였다. 그러다보니 1학년 초에는 글을 모르는 아이들이 많았다. 그렇지만 나는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글을 터득하였다.


그런데 초등학교 2학년이 되었을 때 학교에서 ‘국군장병 아저씨께’라는 편지를 쓰라는 것이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일선장병들에게 위문편지를 쓸려고 하는데 도무지 뭘 써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이후 집에서는 내가 초등학교 2학년이니 편지를 써 보라고 하였다. 글을 읽고 쓸 줄 아니 당연히 편지도 잘 쓸 줄 알았던 모양이다. 그러나 편지도 작문이거늘 어린 나는 막막했다. 강원도 원주로 시집 간 막내 고모에게 편지를 쓰는데, “고모, 잘 계십니까? 우리 가족은 모두 건강하게 잘 있습니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라고 썼다.


이후로 나는 닥치는 대로 책을 읽으며, 사람이 어떻게 말을 짓는지를 눈여겨 보았다. 아무 생각없이 책을 읽게 되면 그냥 스토리만 기억할 뿐, 글을 쓴 사람의 의식을 놓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차츰 깨달았다. 그래서 초등학교 다닐 때 누님들이 읽고 장롱 구석에 숨겨둔 연애소설을 많이 읽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나의 생각을 논리적으로 정리할 줄 알게 되었다.


중학교에 올라가서도 책 읽기와 글쓰기를 하였다. 누님들의 책을 모두 읽어치운 나는 작은방 벽에 붙은 다락이 무척이나 궁금했다. 바닥에 베개를 놓고 그것을 딛고 다락에 올라갈 엄두를 못 내다가, 혹시 다락에 책이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으로 다락에 올라갔다. 다락에는 한때 작은 방에서 살았던 작은 아버지가 읽은 책이었는지, 누님들이 읽고 넣어둔 것이었는지 책과 옛날 물건들이 있었다. 그런데 다락에서 희귀한 것을 발견하였다. 그것은 ‘히야신스’라는 이름이 붙여진 문집이었다. 오래되어 먼지가 낀 이 책은 인쇄본이 아니라 누군가가 직접 필사를 하고 손으로 그림을 그려 정성껏 만든 수제 책이었다. 문집을 만든 사람은 틀림없이 문학을 좋아하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히야신스’라는 책에 자신의 시와 에세이, 그리고 이름있는 문인들의 작품들을 그림과 함께 새겼는데 표지에 히야신스로 짐작되는 꽃을 펜으로 직접 그려서 철끈으로 묶은,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책이다.


나는 그 책을 곁에 두고 혼자서 몰래 보곤 하였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젊은 시절 한때 문학에 대한 열정을 보인 것이어서 ‘히야신스’라는 문집을 매우 귀하게 여겼다. 그래서 나도 문집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여 직접 시를 쓰고 시의 내용에 알맞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그때의 나의 가슴은 무엇인가 벅찬 기운으로 설레었다.


나의 문학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장차 문학을 하겠다는 꿈을 꾸지는 못했던 시절이지만 자신의 생각을 글로 적는다는 것이 성취감을 느끼게 하였다. 날마다 행복한 마음이 충만한 나는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는 듯했고, 문집의 쪽수가 느는 만큼 기쁨이 배가 되었다. 그래서 나의 문집을 읽어보고 또 읽어보는 날이 많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무엇인가 허기가 느껴졌다. 내가 쓴 글들이 감상적이어서 유치하게 보이기 시작하여 더 많은 책을 읽어야겠다고 생각하였다. 당시에 함평읍내에는 서점이 하나 있었다. 읍내 사거리쯤에 명원서림이라는 서점이 있었는데, 그 집 주인은 얼굴이 준수한 젊은 ‘젠틀맨’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 서점에서 살다시피 하였다. 당시에는 책 읽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서 학교에서 개인신상서류를 작성할 때 취미란에는 대부분 ‘독서’라고 쓸 정도였다. 나는 명원서림에서 신간이 나올 때마다 책을 샀다. 명원서림에서는 책을 빌려주기도 했던 것 같다. 그래서 책을 빌려다 보기도 하였다. 그때 독일의 시인 하이네의 시집을 만나 나는 본격적으로 문학인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하였다. 푸른 솔의 이미지를 통해 어떤 시련에도 굴하지 않는 투사의 정신이 좋아보였던 하이네의 시편들은 오늘의 시각으로 보면 속이 비치는 뻔한 것일 수도 있는데, 나는 하이네의 시에 매료되었다. 그래서 자연을 노래하던 나의 글들은 이른바 ‘선비정신’에 알맞은 글들을 쓰려고 하였다.


이후 나는 고등학교, 대학교를 다니는 내내 수많은 시를 쓰는데 몰두하였다. 그때에도 ‘호남예술제’라는 것이 있었는데 해마다 출전하여 입상하곤 하였다.


독서에 대해 허기진 나는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다. 어떨 때는 와룡생이라는 지은이가 쓴 무협지까지 읽어치웠다. 어찌된 일인지 당시의 무협지는 거의 와룡생이 지은이로 되어 있었다. 내가 독서광이 되자 마을의 청년들과 어른들이 내게 책을 빌려가곤 하였다. 그래서 동네 사람들과 돌려가며 책을 읽었다. 그러나 그들은 대부분 무협지 따위의 오락적인 독서에 몰두하였다. 그래서 나는 곧 그들과의 책 돌려보기를 그만 두었다.


나는 담장을 사이에 둔 아랫집에 놀러갈 때마다 뒷방 시렁에 놓인 책들 때문에 미칠 지경이었다. 어떻게 해서라도 그 책들을 가져다 읽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래서 여러 가지 궁리를 하다가 무엇인가를 그 집 아들에게 주고 물물교환을 하여 책들을 가져와 읽었던 기억이 난다. 삼중당 문고에서 펄벅을 비롯한 문학사에 빛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나의 유년과 소년시절 주변에 온통 책으로 가득했다. 좀벌레가 먹어 눅눅한 냄새가 나는 책들이 쌓여갈 때 나는 무척이나 행복했던 것 같다. 오늘날도 책을 많이 읽지만, 자꾸만 책의 내용을 잃어버린다. 그러나 그 옛날에 읽었던 책들은 내용도 선명하지만, 나를 이끄는 훌륭한 안내자가 되어주곤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