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입력 2014.01.21 10:56

<강경호 시인의 추억의 창-11>

강 경 호
(시인, 문학평론가)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에는 기껏 뒷산이나 마을 앞 바닷가에 가본 것이 제일 멀리 간 것이었다. 마을에서 150m 쯤 거리에 있는 바다에 나가 백사장에서 아이들과 놀거나, 바다 갯펄에서 조개를 줍거나 게를 잡았다.
바다에 물이 가득차면 혼자 둑에 앉아 낚시질을 하거나 함평만에 오가는 발동선이나 풍선(風船)을 바라보며 배를 타고 먼 바다로 가면 어떤 세상이 있는지 궁금했다. 밀물이 몰려오면 바다 위에는 갈매기가 끼룩끼룩 소리를 내지르며 날았다. 마을에서 바라보면 바다 건너에 돌머리가 손에 닿을 듯 지척에 있고, 더 먼 곳에 무안군 해제면이 눈에 들어왔다. 우리 마을에 비가 내릴 때도 바다 건너에는 햇빛이 밝게 빛나곤 했는데, 어린 나에게 바다 건너 해제는 미지의 땅이어서 그곳에 어떤 사람들이 사는지 궁금했다.


바다 뿐만 아니라 산 너머 마을도 상상속 미지의 나라였으며 동경의 대상이었다. 마을 뒷산 두루봉에 올라가면 실뱀 같은 길이 산길을 빠져나가며 내 꿈 속의 아득한 곳으로 기어가거나 강물처럼 흘러가는 것이 보였다. 나는 바다나 산 위에서 아득한 미지의 나라를 상상하며 꿈을 꾸었다. 어른의 눈으로 바라보면 모두가 뻔한 것들이지만 다섯 살이거나 여섯 살 적의 일이니 참으로 순진하고 순수한 영혼이 세상을 배워가는 과정이었으며, 장차 문학적 상상력의 자양분을 마련하는 시간들이었다.


아직 속악한 세상을 모르던 어린 아이는 바닷가에 나가 푸른 파도를 건너며 함평만을 빠져 나가는 배를 타고 가면 동화속에서 만났던 기막힌 세계가 펼쳐질 것이라고 상상을 하곤 했다. 두루봉에 올라가서도 산계곡을 헤치며 질주하는 노란 길들을 따라가면 멋진 나라와 멋진 사람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곤 하였다. 그러므로 내가 사는 마을은 견고한 알이었던 셈이다. 나는 알을 뚫어야만 깨어날 수 있는 병아리였던 것이다.


여섯 살 무렵,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직전의 봄날이었다. 마을 사람들이 손불장에 가기 위해 마을 뒤 큰재를 넘어가는 것을 보아온 나는 언젠가는 나도 큰재를 넘어 넓은 세상을 구경하고 말겠다고 벼르고 있었다. 큰재는 달구지조차 다닐 수 없는 길이었지만 수백 년 동안 마을 사람들이 다니던 길이었다. 내가 두루봉에 올라가 바라보면 큰재를 넘어온 길이 산을 헤치고 어디론가로 가는 것을 보고는 그 길을 따라가고 싶었다.


손불장날, 마을 사람들이 큰재를 넘어 장에 가는 것을 보았다. 나는 마을 사람들과 적당한 거리를 두고 큰재를 넘었다. 사람들에게 들키면 우리 부모님께 일러바칠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산길을 따라가다 보니 이따금 집 몇 채가 있는 작은 어촌마을이 나타나곤 했다. 소를 앞장 세우고 들로 쟁기질 하러 가는 아저씨도 길에서 만나고 지저귀는 산새 소리도 들려왔다. 고갯길을 넘고 산길을 지나다보니 다리가 뻐근하게 아파왔다. 생전 처음으로 오랫동안 길을 걸어서 한참만에야 손불장에 도착했다.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큰 세상을 만나게 되었는데, 어디에서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모였는지 어리둥절 했다. 뿐만 아니라 눈이 뒤집힐 일은 장에서 팔고 있는 여러 가지 물건들이었다. 먹을 것도 많았다. 한참동안 장터를 구경하며 돌아다녔다. 배가 고팠다. 팥죽이나 국수 파는 데가 있었지만 나는 돈이 없었으므로 뱃속에서 꼬르륵 거리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장터를 돌아다니다가 나는 문득 집으로 돌아갈 일이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먼저 올 때에 눈여겨 두었던 길을 따라 산길에 접어들었다. 해가 서산으로 기울기 시작해지자 마음이 바빠졌다. 그러다가 나는 길을 잘못 들었다. 전혀 낯선 풍경이 나타났다. 나는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며 엉엉 울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어떤 중늙은이가 나타났다. 들에 나갔다가 집으로 돌아가는지 삽을 들고 있었다. 중늙은이는 내가 길을 잃은 것을 알고 나의 마음을 진정시켜주었다. 그러면서 데려다 주겠다며 내 손을 잡고 앞장섰다. 중늙은이는 길에서 만난 사람에게 아이 하나를 주웠다고 말했다. 한참 길을 가는데 우리 마을 사람들이 나타났다. 장에 갔다가 집으로 되돌아가는 중이었다. 나는 무척이나 반가웠다. 마을 사람들을 따라서 산길을 걸었다. 한참을 가다보니 큰재가 보였다. 날은 벌써 어둑해져가고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유년의 작은 이야기이지만, 그러나 처음으로 세상구경 나간 그 사건은 나에게 많은 의미를 띈다. 세상이 어떤 것인지를 처음 알려줬고, 세상의 길은 하나가 아니여서 여러 개의 길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뿐만 아니라 잘못된 길도 길이며, 누구든지 자신이 선택한 길을 가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을 가르쳐줬다. 유년에 처음 내가 다녀온 그 길은 지금 생각하면 훤히 아는 길이지만, 그러나 처음 나선 그 길은 낯설고 두려운 길로 인생길에서 수없이 만나야 할 그런 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