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입력 2002.04.10 17:04

함평 오씨(咸平 吳氏)

함평 오씨는 모평(牟平)의 토박이였다. 그러나 현재 1985년 11월 1일에 실시한 경제기획원

조사통계국의 씨족별 인구조사 통계에 의하면 함평군에는 2가구 10명이 살고 있을 뿐이며

일찍이 세거지를 충남 공주군 우성면 상서리 방교리로 옮겨 공주 군에 1백48가구 5백73명이

살고 있으며 전국적으로는 7백47가구 3천2백82명의 분포를 보이고 있다.

증보문헌비고에 따르면 함평 오씨의 시조는 모평현감을 지낸 순민(舜民)으로 기록되어 있

다. 그러나 현 함평 오씨는 시조를 잠(岑)으로 정리하고 있으며 묘소도 공주시 웅진동에 모

시고 있다.

잠은 비조 첨(瞻)의 25세손으로 현보(賢輔)의 넷째 아들이며 고려 원종(元宗. 재위 1260∼

1274)때 문과에 급제하여 태자태사 문하시중(太子太師 門下侍中)을 역임하고 좌명공신으로

함풍군(咸 君)에 봉해져 해주 최씨에게 분적(分籍)하여 본관을 함평이라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오씨의 대동보(大同譜)에 따르면 도시조 첨은 신라 22대 지증왕 때(智證王, 재위 500∼513)

중국에서 우리 나라로 건너왔고 그가 중국으로 돌아갈 때 둘째 아들 응(膺)이 함양에 남아

살았다.

그 후 응의 13세손 광우(光佑)가 중국에 들어갔는데 그에 현손 연룡(延龍)이 고려 문종30

년(文宗. 1076)에 우리 나라에 건너와 정착함으로써 오씨의 중시 조가 되었다.

연룡의 6세손 수권(守權)의 큰아들 현보(賢輔)는 해주군(海州君)에 봉해져 해주 오씨의 시

조가 되고 둘째 현좌(賢佐)는 동복(同福)오씨, 셋째아들 현필(賢弼)은 보성(寶城)오씨의 시조

가 되었다.

해주 오씨는 함평 울산 낙안 고창 평택 오씨로 분간되었고 동복 오씨에서는 군위, 보성 오

씨에서는 화순 함양 장흥 흥양 오씨가 분적했다.

문헌에 의하면 오씨는 1백64 또는 2백10본이라고 하지만 1985조사통계에 따르면 69개 본으

로 전국적으로 5백가구가 넘는 본은,

해주 90,845가구 377,016명 보성 12,342가구 52,444명

동복 11,977가구 50,648명 고창 6,381가구 27,772명

나주 6,003가구 26,245명 함양 5,354가구 22,158명

군위 5,069가구 21,724명 낙안 1,774가구 7,410명

금성 1,178가구 5,204명 장흥 876가구 3,898명

함평 747가구 3,282명 화순 664가구 2,888명

울산 660가구 2,696명으로 함평 오씨는 오씨 중에서 11위의 씨족이다.

함평 오씨들이 그들의 텃자리인 모평을 언제 떠났는지는 자세한 기록이 없어 정확히는 말

할 수 없다. 다만 시조 묘가 공주에 있는 것을 보면 모씨(牟氏)의 세(勢)에 눌려 고려말쯤

텃자리를 떠났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함평현 읍지에 가끔 함평 오씨 인물이 적혀있을 뿐 조선조에는 특출한 인물을 배출하지 못

했다. 세가 꺾인 것도 현달한 인물이 후대에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함평의 모평을 떠나 공주 군 우성면 상서 리에 정착한 함평 오씨들은 전국에서 공주 군을

제외하고는 자작일 촌을 이룬 곳이 없으며 많이 살고 있는 곳은 서울 2백11가구 8백87명 전

북 80가구 3백80명 경기·인천 1백가구 4백25명 광주·전남 59가구 3백72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