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입력 2014.01.21 10:45

강경호 시인의 추억의 창 -7

강 경 호
(시인, 문학평론가)
1964년 3월 5일. 나는 함평서초등학교에 입학했다. 그날 작은 어머니를 따라 한 살 위의 작은집 형과 함께 황토고갯길을 넘고 냇가를 건너 학교에 갔다. 어찌되었는지 아버지, 어머니가 나를 데리고 학교에 가지 않고 작은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입학식에 참석했다. 가슴에는 커다란 손수건을 달았는데 이제 막 부모님 곁을 떠나 세상에 나간 어린아이에게 코가 나오면 닦으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나는 살아가면서 별로 떠오르는 것이 없는 초등학교 1학년 때의 기억이지만 곱게 한복을 차려 입은 작은 어머니를 따라 사촌 형과 함께 황토고갯길을 넘어가는 햇살 좋은 날의 풍경이 떠오르곤 한다.


처음 본 이 세상에서 가장 큰집이기도 했던 학교건물과 수많은 사람들 때문에 기가 질렸던 것 같다. 이때 쯤 나는 벌써 작은 누님을 통해 한글을 떼었다. 다른 아이들이 “가갸거겨”를 외울 때 일찌감치 누나들의 교과서를 읽고 있었다. 장차 국문학을 전공하고 시인과 문학평론가가 되어 대학에서 아이들에게 시를 가르치게 하려는 운명의 길에 들어섰는지 모른다. 지금도 생각나는 것은 나중에 사법고시에 합격한 동네 형이 초등학교 선배로서 어린 동네 동생들에게 낱말쓰기 시험을 보게 했을 때 나는 재빨리 답은 쓰곤 했는데 다른 아이들은 끙끙 앓으며 답을 생각했던 기억도 떠오른다.


나는 산수가 제일 싫었다. 구구단 외우는 것도 재미가 없었다. 그런데 글 읽기와 글쓰기는 무조건 재미가 있었다. 누님들이 몰래 보던 연애소설까지 닥치는 대로 읽어치우곤 했다. 심지어는 껌 종이에 깨알보다 작은 글씨까지도 읽어치웠다. 까만 것은 개미까지도 글씨로 보이던 초등학교 1학년 때였다.


그러나 초등학교 1학년에 입학한 직후에는 학교 운동장에서 변소 가는 법, 교실에 가는 법, 학교에 오가는 길에 대한 안내부터 배웠다. 남학생들이 소변보는 변소는 학교 귀퉁이에 콘크리트로 만든 웅덩이 같은 것이었다. 종소리가 두 번 울리면 참았던 오줌을 누기 위해 아이들은 웅덩이 변소간을 향해 모두 바지를 내리고 고추를 내놓고 오줌을 갈기곤 했다. 그런데 우리 동네 아이 하나가 잘못하여 이른바 똥통에 빠지고 말았다. 선생님이 그 아이를 우물가로 데려가 씻기고 그 아이의 형은 십 리도 더된 마을까지 한달음에 달려 옷을 가지러가기도 하였다. 한동안 우리는 똥통에 빠진 아이 곁에 가는 것을 꺼려했다. 아이들은 똥통에 빠지면 키가 안 자란다고들 했다. 그런데 그 아이는 아주 키가 크게 자라 건강한 사람이 되었다.


똥통에 빠진 아이네는 동네에서 제일 가난했다. 그때쯤 월사금이라는 것을 학교에 내야 했는데, 많은 아이들이 이른바 수업료를 내지 못했다. 선생님은 일일이 그 아이들의 명단을 부르며 집으로 돌려보내 월사금을 가져오라고 했지만 없는 월사금을 쉽게 납부하지 못했다. 그런 아이들은 학교에 오는 것이 두렵고 자신감이 없어 기가 죽기도 했던 것 같다. 벌써 50여 년 전, 순박하지만 가엾은 우리들의 초상이었다.


그때는 대부분 가난해 제대로 된 도시락을 싸가지고 오지 못했다. 상급반이 되면 수업이 늦게 끝나기 때문에 도시락을 싸가지고 와야 하는데 굶는 아이들도 있었다. 어떤 아이는 기름에 섞은 소금을 싸오는 아이도 있었다.


지금도 가슴 아픈 기억은 낮반의 여동생이 오라비의 도시락을 가지고 학교에 오다가 배가 고파 절반 쯤 먹은 도시락을 오빠에게 내민 일이다. 얼마나 배가 고프면 도시락을 까먹었을까 하는 생각과 함께 멋쩍고 미안한 표정의 어린 소녀의 모습이 오랫동안 가슴을 쳤던 기억이 내 유년의 흐릿한 풍경 속에 얼비친다.


우리 집 역시 가난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집안의 종손인 나에게는 부모님들께서 마치 여왕벌처럼 여기시며 그림이 그려진 반달 같이 생긴 도시락에 밥을 싸주시곤 하였다. 그래서 점심시간이면 아이들이 내 도시락통에서 멸치며, 단무지, 계란말이를 가져다 먹는 바람에 점심시간이 고역이었던 기억도 아슴하게 떠오른다.


그 무렵 아버지께서 운동화를 사주셨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흰 고무신이나 검정고무신을 신고 다녔다. 물속에 들어가기 좋은 고무신은 물에 젖은 채 달려가며 미끄러지기 십상이었다. 그런데 나만 운동화를 신고 다니니 아이들에게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다. 나는 운동화를 신고 다니는 것이 대단한 자랑거리인 양 뻐기고 다녔다. 학교 조회 때였던가. 2000여 명이나 되는 아이들이 월요일이면 교장선생님의 훈화를 듣기 위해 학교 운동장에 모여 있었다. 참으로 지겨운 뻔한 내용의 훈화였다. 그런데 여학생들이 수군대기 시작하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내가 신은 운동화가 여학생 것이라는 것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버지는 아들에게 좋은 신발을 사주고 싶어 그것이 여학생용인지 남학생용인지도 모르는 운동화를 사셨던 것이다.


신발 이야기를 하다 보니 유년의 작은 사건 하나가 떠오른다. 바닷가 마을에 살던 나는 틈만 나면 바닷가 백사장에서 놀았다. 바닷물이 들어오면 고둥을 돌로 쳐서 그 알갱이를 낚싯대에 꽂고 운저리나 복어를 잡았다. 물이 빠지면 갯벌에 들어가 조개를 줍기도 하였다. 바다가 어린 우리들에게는 놀이터였던 것이다. 그런데 한번은 갯벌 깊숙한 곳에 빠졌다가 신발 한 짝을 잃어버렸다. 엉엉 울며 신발을 찾았지만 끝내 찾지 못했다. 그날 저녁, 아버지께 호된 꾸지람을 받았다. 신발을 잃고 집에 들어가기 두려워 집밖에서 망설이던 까만 두 눈의 어린 아이의 모습도 살아가면서 신발을 볼 때마다 떠오르던 풍경이다.


이제 내게 꾸지람을 해줄 아버지도 돌아가시고 안 계신다. 다만 아버지가 이 세상에 신발처럼 벗어놓고 간 내가 남아 길을 가고 있을 뿐이다. 아버지가 먼저 갔던 길을 따라 걸어가며 나도 어느덧 젊은 시절의 아버지보다 더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세월이 흐르면 모두가 떠나기 마련이지만 먼저 간 발자국을 따라가면 옛날을 생각하며 그리워하고 눈물짓는 것이 인간의 삶이라니, 참으로 가슴이 저릴 때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