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입력 2014.01.21 09:37

강 경 호
(시인, 문학평론가)
나의 유년시절인 1960년대, 그때는 모두가 배가 고팠다. 6·25 전쟁이 끝난 지 10여년이 갓 지났으니 모두가 헐벗고 남루한 살림살이를 해야 했다. 그런데 집집마다 식구들이 열 명, 또는 열두 명 이상이었기에 더욱 입에 풀칠하기가 힘들었다. 우리 마을에서는 마을 앞 바다에 나가 물고기를 잡아 읍내에서 가용할 돈을 마련하는 집들이 많았다. 특히 겨울에서 봄으로 이어지는 이른바 보릿고개에는 더욱 먹고 살기가 팍팍해 빨리 보리가 여물기를 바랐다. 그래서 집집마다 쌀밥을 구경할 수가 없었다. 이른 봄이 되면 쑥에다 밀가루를 범벅한 쑥범벅을 먹기로 하고 퇴비용으로 논에 뿌린 자운영을 뜯어 먹기로 하였다.


겨울철이 되면 어린 우리는 마을앞 바다 갯펄에 나가 날씨가 춥지만 추운 줄도 모르고 삽으로 게를 잡았다. 나는 모든 게 서툴러서 아랫동생이 삽으로 갯펄을 파서 게를 잡는 것을 구경하였다. 물이 빠진 바다의 갯펄은 단단하여 발이 빠지지 않았다. 이곳에는 농게를 비롯한 다양한 바닷것들이 살았다.


여름엔 엄청난 게들이 기어다녔다. 밀물이 들어오면 짱뚱어, 망둥어가 파도에 살살 기어다녔다. 겨울이 되면 이것들은 얼씬하지도 않아 코빼기도 볼 수 없었지만 삽으로 게구멍을 파면 게들이 나왔다. 이놈들을 찌그러진 노란 양은주전자에 절반쯤 잡아 집으로 돌아가 볶아 먹으면 참으로 맛있었다. 주로 게요리는 조선간장에 볶아먹는 것이었는데 그 놈들과 버무린 장맛은 일품이었다. 여름철엔 반찬이 없어 검은 게장에 밥을 비벼 먹곤 했는데 유년에 길들여진 나의 입맛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그 맛을 잊을 수가 없다.


1960년대, 나라에서는 경제개발 계획을 수립하여 수천 년 물려받은 가난을 청산하기 위해 열심히 추진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정책은 수천 년 이어온 농경국가의 전통을 단절시키고, 농촌을 소외시키는 정책이었다. 대대로 농사를 지어온 농촌사람들은 무작정 상경을 하기 시작하였다. 모두가 서울로 올라가 이른바 공돌이와 공순이가 되어갔다. 명절 때면 고향에 내려와 처녀총각들을 끌고 도시로 갔다.


나의 누님도 서울에 갔다. 명절 때면 누님이 오는지 마을 어귀에서 귀성객 사이로 살펴보곤 했다. 그때 서울에서 고향에 돌아온 사람들의 살결이 희다는 것을 알았다. 햇볕을 덜 쬐어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린 나이에 서울이라는데가 좋은 곳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농촌은 공업일변도로 근대화를 이끌어가는 나라의 희생양이 되어가고 있었다.


배고프던 그 시절, 함평만은 아름다웠다. 특히 해가 지는 장면은 가슴을 두근두근하게 하였다. 하늘과 바다가 맞닿아 붉게 타곤 했는데 그때쯤 발동선이 연기를 내품으며 주포항으로 들어오는 모습은 한 폭의 그림 같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했다. 하늘과 바다가 붉게 타고 어린 나의 가슴이 뿌리부터 뜨겁게 불타올랐다. 그 바다에 허기진 우리들은 겨울이 되면 새벽 일찍 일어나 바닷가 백사장을 달려갔다. 겨울 추위에 죽은 물새를 줍기 위해서였다. 어떤 날은 두세 마리의 청둥오리가 뻣뻣하게 죽어 있었다. 그런 날은 횡재한 기분이었다. 그 날은 온 가족이 기름기 넘치는 오리국을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바다는 우리들에게 어머니처럼 먹을 것을 주는 자애로운 바다였다. 그러나 무더운 여름날 바다에서 수영을 하다가 아이들이 익사하기가 다반사였다. 해마다 연례행사처럼 아이들이 죽어나갔다. 동네 청년들이 바다를 뒤져 백사장에 건져 올린 아이의 주검 앞에서 아이의 어머니는 통곡하였다. 뿐만아니다. 자애로운 손길 뒤에 바다는 밤중에 물질하는 사람들을 고약한 용왕처럼 잡아가기 일쑤였다. 어떤 때는 먼 곳에서 익사한 사람들의 주검을 우리 동네 백사장에 갖다 놓기도 하였다.


그래도 바다는 아무 말 없이 하루에 두 번씩 밀물로 쳐 올라왔다가 할머니의 스란치맛자락처럼 스르르 빠져나가곤 하였다. 그때의 그 바다는 참으로 맑았다. 너무 맑아 김장 때에는 무나 배추가 밭에서 바닷가로 내려왔다. 바닷물에 절이기 위해서였다.


삶과 죽음이 교차했던 내 유년의 바다, 그 바다는 오늘도 말이 없이 수만 년 해 왔던 것처럼 철썩철썩 무어라고 중얼거린다. 그 알아들을 수 없는 바다의 말이지만 나는 파도소리를 들으면 배고팠지만 때묻지 않은 순박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