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입력 2010.05.17 10:35
“꺄악!.”
아이는 벌써 세 번째 번데기를 바닥에 내동댕이치고 있다.
프로듀서는 내색도 않은 채 아이를 달래고 있다.
“얘야, 이 번데기 색깔 좀 봐! 이건 무슨 색이니?”
“까만색.”
“이 건?”
“파란색.”
“파란색이라고?”
“아니, 녹색이요.”
“그래? 그럼 왜 번데기의 색깔이 다르다고 생각하니?”
“보호색이요.”
“그렇지? 그걸 손바닥에 올려놓고 설명할 수 있겠니? 자.”
하지만 손바닥에 올리면 아이는 다시 질겁하고 만다.
‘번데기는 스스로의 몸을 보호하기 위해 풀잎에서는 파란색, 돌 틈에서는 검은 갈색과 같이 보호색을 띠어 쉽게 눈에 띄지 않아요.’
옆에서 지켜보며 애타하던 내가 마음속으로 기대하는 모범 답이다.
프로듀서는 다시 시작했다.
“나뭇잎에 붙은 번데기는 잘 보이던가요?”
“잘 안보여요.”
“왜 안보였을까요?”
“너무 작아요.”
“번데기가 가만있으니 무감각해요.”
2,3학년 아이들에게 어려운 답이라는 걸 알면서도 좋은 화면을 얻고자 프로듀서의 질문이 반복되나 싶었다.
그래서 내가 나섰다.
“얘, 수진이 너 나와서 얘기해 봐.”
평소 똑똑함이 돋보이던 아이여서 기대를 했다.
“자신 없어요.”
‘흐음, 간섭하지 말자. 아이들 흐름대로 놀고 있는 모습 찍다보면 좋은 장면도 나올테지!’
5월 5일 어린이날 아침에 특집 방송을 지켜보았다.
오후 내내 땀 흘렸던 방송 촬영에 비해 방영된 시간은 고작 2분이 좀 넘었다.
‘후후! 그 짧은 순간을 위해 아이들 애썼네. 우리는 옆에서 또 얼마나 마음 졸였나?’
그런데 TV는 확실히 큰 힘이 있다.
얼굴을 보이고 짧게 몇 마디 방송에 나온 어린이는 다음날부터 태도가 달라졌다.
자신감일까?
한층 의젓하고 책읽기에 몰입하며 표정이 풍부해져 보이는 것이다.
아니 그보다 방송에 나오지 않았더라도 카메라 앞에 서 본 아이는 자기 자신이 TV에 출연한 듯 출연자와 비슷한 감정을 갖는 것 같다.
다행이랄까? 요즘에는 공연에 참여하거나 화면에 출연하는 아이들이 많다. 학교 학예회에서도 카메라가 돌아가고 추석날 가요제에서도 아이들은 재롱을 뽐내는데 거리낌이 없다.

이제 자랑스럽게 함평의 이미지가 되어버린 나비와, 나비 축제에 언제든 또 나비 인터뷰가 있을지 모를 일이어서 아이들에게 자세히 설명을 해 주고자 연구소에서 번데기 15마리를 얻었다.
그걸 양복 안주머니에 넣었다.
‘면으로 된 호주머니 안은 포근해서 편한 쉼터가 되겠지?’
‘그리고 학교 화분에 붙여주면 나비로 바뀌겠지?.’
월요일에 학교에 오니 호주머니에서 짙은 냄새가 나고 있었다. 조심스레 꺼내보니 주머니안에서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대여섯 마리의 번데기가 꽁무니에서 실을 빼어 서로 동그랗게 꽁무니를 붙이고 있었다.
서너 마리도 비슷한 모양새로 실을 내어 몸을 붙이고 있다.
몸을 붙이지 못한 번데기 몇 마리는 노랗고 끈적이는 배설물을 쏟아 놓고 있었다.
그 배설물에서 냄새가 배어 나오고 있었는데 주회에 참가하려고 물로 헹구어 보았으나 냄새는 지워지지 않았다.
‘뭘까?’
‘배설물의 의미를 이해하는데 한참이 걸렸다.’
주회시간이 되어 전교생이 모여 있는 도서관으로 갔다.
식이 끝날 무렵 앞으로 나갔다.
“어린이날 ‘세상의 아침’ 본 사람?”
출연 아동 수 정도가 여기저기서 손을 들었다.
자기가 출연하고 자기 모습 나오겠다 싶은 어린이들이 시간 맞추어 TV를 본 셈이다.
“TV에 자기 얼굴 나온 친구?”
두세 명이 손을 든다.
“마음에 들었어요?”
“네에”
자기 얼굴만 나오면 무조건 기분이 좋은가 보다.

주머니에서 번데기를 꺼냈다. 대여섯 마리가 몸을 붙이고 뭉쳐 있는 모습을 들어 보였다.
“우리학교 촬영하던 날 여러분 인터뷰 때 가지고 온 거예요.”
줄이 흐트러지며 가까이 보려고 아이들이 몰려들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꽁무니에 실을 내어 몸을 붙이고 있을까?”
“……”
“이 번데기들은 선생님 안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거고 오늘 아침에 화분에 붙여주려고 했던 거예요.”
“왜 화분에 붙이는데요?”
“글쎄? 곤충연구소에서도 아저씨들이 다 자란 번데기를 판지에 붙이는 것 보았지요?”
“예.”
“그런데 몸 붙일 곳을 찾지 못한 번데기들이 꽁무니에서 실을 뽑아서 자기들끼리 이렇게 모아 있네.”
“그래야 번데기에서 나올 수 있는가 봐요.”
“어떻게?”
“몸을 붙여놔야 번데기를 열고 나오기가 쉬울 거 같아요.”
“오! 100점, 한 마리씩 떨어져 있으면 번데기에서 나올 수 있을까?”
“아니요.”
“그래. 번데기에서 나비가 나올 때 껍질이 같이 움직이면 등을 트고 나올 수 없으니까 어떻게든 몸을 고정시켜 보겠다고 꽁무니에서 실을 뽑아 이렇게 뭉쳐 있네.”
아이들은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들이 되어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매달려 있는 번데기라 할지라도 사람 호주머니에 감금되니 움직거리고 꽁무니에서 실을 뽑아 뭉쳐서 깨어나려는 몸부림은 생명의 또 다른 경이로움 아닌가?’
교무실 화분에 번데기를 정성껏 붙여주며 마음으로 기원하였다.
‘모두 탈 없이 예쁜 나비로 태어나서 훨훨 날아가는 모습을 보여 주렴!’

잊고 지내던 어느 날 먼저 깨어난 나비 한두 마리가 아직도 깨어나지 못한 번데기 주위를 날다가 옆에 가 앉고는 했다. 그러나 다른 번데기에서는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었다.
깨어나지 못하는 번데기들은 그 미세한 움직임에도 자신을 고갈 시켜 결국 등을 째고 나올 에너지를 얻지 못하고 만 것으로 보인다.
시간이 지나 서너 마리의 나비가 깨어나 나무 주변을 맴돌다가 열어놓은 창문으로 어디론가 날아가고 있었다.
‘작은 곤충에서도 여러 가지 삶의 지혜를 배우는데 아이들 배움의 터인 학교에서 무엇인들 쉽게 대할 수 있을 것인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당장 비가 쏟아질 것 같은 오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