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입력 2010.03.31 11:08

 

 

신광면 송사리 삼천동(三泉洞), 태곳적부터 극심한 가뭄에도 물이 마르지 않는 좋은 샘이 세 개가 있었다하여 불려진 마을. 신광면소재지를 지나 군유산을 향하다 보면 좁은 농로를 따라 고개 넘어 군유산 밑 삼천동 입구에 도착한다.

오래된 고목이 너스레지게 늘어진 한가운데 오래된 비석 하나가 서 있다. 조선 마지막 궁중여류시인 최송설당(崔松雪堂·1855∼1939)의 비석이다.

신광면 송사리 삼천동 마을입구에 세워진 최송설당 여사의 비석. 경북 김천고등학교에 같은 비석이 있다

‘한 여자의 몸으로 몸에 걸칠 옷가지를 빼놓고는 가진 것 모두를 송두리째 국권 회복을 위한 민족교육사업에 바친 할머니가 있으니 그가 바로 최송설당이다.’며 비에 새겨진 내용처럼 역모로 몰락한 사대부 집안에서 태어나 궁녀가 되어 가문을 복권시키고 교육사업가로 일생을 마친 그녀.

송설당의 본관은 화순, 조상은 평안도 정주에서 사대부의 대를 이어 살았다. 증조부의 외가가 홍경래란에 가담했다하여 그 연좌죄로 외조부는 옥사하고 조부는 전라도 고부로 귀양 가 죽게 된다. 아버지 창환이 친족이 사는 경북 김천으로 옮겨온다. 그녀는 김천 문당동에서 1855년 무남 3녀의 맏이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노모와 여동생를 돌봐야 하는 그녀는 갖은 고생을 다했다. 친정식구를 먹여 살려야겠다는 생각에 조건부로 백 모 집으로 출가한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남편 백 씨는 죽고 만다. 다시 친정으로 돌아온 그녀는 1894년 동학란을 피해 재혼한 남편 이응교와 함께 상경한다. 이때 나이 마흔.

상경한 그녀는 고종이 총애하는 엄상궁과 인연을 맺게 되고 이후 엄상궁은 민비의 뒤를 이어 왕비로 책봉된다. 엄비(嚴妃)가 황태자 은(영친왕)을 낳자 송설당은 그의 보모가 됐다. 대한제국 황실에서 부와 권력을 거머쥔 그녀는 1901년 집안을 복권시켰고 궁을 나온 뒤인 31년에는 사재를 털어 김천고등보통학교(현 김천중고교)를 세웠다.

연루돼 몰락한 양반가의 맏딸,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 이은(李垠·영친왕)의 보모, 전 재산을 학교 설립에 바친 교육자…. 파란만장한 일생을 살았던 조선의 마지막 궁중 여류시인 최송설당의 한시와 국문가사 등이 실린 ‘송설당집(松雪堂集)’이 ‘송설당의 시와 가사’(어진소리)란 제목으로 완역 출간되기도 했다.


한편, 삼청동 산자락에 송설당 부모의 묘가 있다. 그녀가 세운 비석과 부모의 묘가 논밭을 가로질러 마주보고 있는 모습이 애달프다. 친족마을인 삼청동에 자주 찾은 그녀는 금화 80개를 마을에 기부했고 최씨 문중은 이것으로 일대 농지를 모두 구입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학교역(현 함평역)에서 이곳까지 비석을 옮겨오는데 비단을 깔고 올 정도로 송설당의 재력은 대단했다고 마을 어르신들은 전했다.

‘...높이 솟은 군유산 밑에 영친왕이 유모 찾던 부귀영화도 송설당 넋두리도 한때 꿈인가...’ 1958년 당시 신광서초등학교 정 모 교장이 군유산 8경을 노래하며 부른 가사의 일부이다. 지금도 당시 제자들은 교장선생님께서 자주 부르셨던 이 가사를 기억하곤 한다.


최송설당 여사(앞쪽)와 고하 송진우(뒷줄 왼쪽), 몽양 여운형 선생이 자리를 함께했다.

“그 당시 나는 바람 타고 씨가 날아와 생겨난 소나무였다.… 시원스럽게 선조들의 한을 풀고 따뜻한 봄날을 회복하니 그때 나는 임금님의 은혜를 흠뻑 받은 늙고 큰 소나무였다. 한편 조상의 산소를 깨끗이 정돈하면서 추모의 정을 이기지 못한 그때에 나는 조상의 산소에 부슬부슬 내리는 눈이었다.” -‘송설당기(松雪堂記)’

“영원히 사립학교를 육성하여 민족정신을 함양하라. 교육받은 한 사람이 나라를 바로잡을 준수하되 부디 내 뜻을 잃어버리지 말라.”(최송설당의 유언 중에서)

그녀의 유언에서 얼마나 교육을 중시했는지 알 수 있다. 그녀가 함평에 남긴 작은 비석 하나에서 함평 교육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을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