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입력 2007.03.10 10:04

비민보세(裨民補世)


 

 지난 2월 23일 과천의 법무부 대강당에서 신임 법관 92명의 임관식이 있었다. 사법고시를 거쳐서 연수원을 수료한 새내기 검사들의 임관식이 열린 것이다. 이날의 임관식에서 김성호 법무부장관은 다산 정약용 선생의 ‘비민보세(裨民補世)’라는 말을 소개하며 국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검사가 되어 줄 것을 당부하였는데, 이 말은 “국민에 도움이 되고 세상에 보탬이 돼야 한다”는 뜻이다.


 이 나라가 법치(法治)를 근간으로 하는 민주주의임에 틀림없음을 상기할 때 법을 집행해야 할 신임 검사들에게 주무장관으로서 국민을 대신하여 주는 시의 적절한 훈시임에 틀림이 없는 것 같다.


 김성호 법무부장관이 다산 선생의 말을 인용한 것은 특별한 이유가 있을 것 같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조선 후기의 실학자로서 우리 역사속의 어떤 인물보다도 더욱 가깝게 느껴지는 분이다.


 경기도 남양주군 조안면 능내리가 고향이신 선생께서는 조선후기 민생의 개혁의지로 백성을 다스리려 했던 정조의 총애를 받으며 22세 때 경의진사가 되었고 민심을 살피는 암행어사를 비롯해 참의, 좌우부승지 등 벼슬길에 나아가 일했다.


 그러나 형인 정약종으로 인하여 시련을 겪기 시작해 마침내는 유배를 당하고 결국 곡산도호부사를 끝으로 벼슬길을 접는다.


 그 뒤 선생을 총애하던 정조가 죽고 정조 사후 책통사건으로 투옥되었다가 1년 후 포항에 유배된다. 다시 1801년에는 강진으로 이배되었다.


 강진 동문 밖 주가에서 4년간 거처하며 고적한 생활을 했던 다산은 1808년 다산초당으로 옮겨가 1년 반 동안 머물렀다. 여기에서 선생은 <주역상전> <흠흠신서> 등 6경 4서와 1표 2서를 완결 짓는다.


 마침내 회갑이 되던 해 귀양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