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입력 2007.01.10 10:03

이명하(李命夏) 선생(1878. 1. 23 ~ 1921. 3. 3)



1. 선정배경


경기 광주에서 세종대왕의 다섯째 아들 광평대군의 후손으로 태어난 선생은 유인석 문하에서 위정척사론적 민족의식을 배양했다.


이어 근대 교육기관으로 변신 중이던 성균관에서 한학과 신식 학문을 수학하여 신구학문을 겸전한 근대지성으로 성장했다. 이를 바탕으로 관직에 나가서는 근대학교를 세워 국민계몽운동에 힘썼다.


하지만 을사늑약과 정미 7조약의 강제 체결로 국권이 훼손되고 일제의 내정간섭이 심화되자 과감히 관직을 박차고 나가 의병투쟁에 나섰다.


이강년 의병진에 참여하여 소모장으로 활동하며 일본 군경과 무장투쟁을 벌이고 친일관리를 숙청했다. 나아가 이강년 의병장과 함께 13도 창의군에 참여하고 각지를 돌며 의병운동의 발흥을 촉구하다 일경에 피체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 직후 경술국치를 당하자 국권회복 운동을 위해 서간도로 망명하여 이진룡 의병진에서 무장투쟁을 계속했다. 3·1운동 직후에는 서간도에서 조직된 대한독립단 무장대에 참여하여 국내 진공작전을 여러 차례 펼쳤다.


또한 국내 무장단체인 보합단과 연계하여 군자금을 모집하며 친일파를 숙청했다. 일제의 ‘경신대 토벌’ 작전으로 만주에서 무장투쟁이 어렵게 되자 압록강 대안의 교통 요지인 중국 안동으로 활동무대를 옮겼다.


여기서 군수품을 마련하여 재차 무장투쟁을 준비하다 일본경찰대의 추격을 받아 격렬한 전투를 벌이다 동지들과 함께 전사, 순국한 선생의 독립운동 공훈과 순국 85주기를 기리어 선정했다.




2. 주요공적


 ○ 1907  이강년 의병진 소모장


 ○ 1910  이진룡 의병진 참여, 의병활동


 ○ 1919  대한독립단 무장대로 국내진공전


 ○ 1921  일경과 교전 중 전사, 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