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입력 2004.04.30 10:02

이인행선생 행적및 생가를 찾아서




3월을 맞이하는 마음은 항상 숙연하고 새롭다.

기미년 그 외침의 목소리가 우리 후손의 가슴 저편에서 메아리로 들려 오는듯 하기 때문이다.

그날의 자랑스런 선열들의 행적들은 무수한 역사적 기록으로 보존되어 우리에게 전해 오고 있지만 우리고장 해보면 4?8만세 탑을 참배하면 우리들의 심장을 뜨겁게 달구게 한다.

본지는 일제 강점기 동안 무수히 많은 독립사사가 배출된 우리지역 함평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그들 중 함평지역을 대표해 활약한 이인행선생의 행적을 소개한다.



애국지사 이인행선생 독립운동 행적소개

지사(志士)이인행(李仁行)선생은 함평군 나산면 초포에서 재관(載琯)공과 나주(羅州)林彦圭)공의 따님사이에서 맏아들로 1807년 7월 27일에 태어나 이름은 홍근(洪根) 자(字)는 인행(仁行)호(號)는 삼역(三亦)으로 병조정랑(兵曹正郞)공 계일헌(戒逸軒) 명룡(命龍)의 7대손, 이조정랑공삼회재(三悔齋) 돈현(敦賢)의 5대손이다.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선생은 통분을 안고 조국광복에 헌신할 것을 결심하고 독립운동대책을 도모하던 중 1919년 고종황제의 국상에 참례(參禮) 곡반소(哭班所)에 입곡 후 호남 인사들과 결속하여 손병희외 32인의 독립선언문 선포식에 참여하여 인산인해를 이룬 애국시민들과 함께 태극기를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시가를 행진하다가 일군경에 포박되어 종로경찰서에 연행된 후 심한 고문으로 상해를 입고 석방됐다.

동지들의 구원으로 치료 후 전남 장성의 기산도(寄山度)동지와 협력 한남수(韓南洙)동지가 주도하는 인천월미도대회에 참가 독립사상 고취를 목적으로 한 취지문을 작성소지하고 장성의 기산도, 박은용, 광양의 황병학, 영광의 김종택, 함평의 이인행, 고창의 민치환, 경성의 김철 등이 파견되니 때는 1919년 3월 16일이었다.

선생은 고향인 함평을 담당 조사현(曺士鉉), 송대호(宋大浩), 정기연(鄭寄衍), 모순기(牟順基) 동지들과 함께 함평 장날인 1919년 4월 7일 태극기를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절규하며 시가행진케 하였으며 해보면 이윤상(李潤相), 월야면 김기택(金基澤), 정용섭(鄭龍燮),장효섭(長孝燮), 정재식(鄭在植) 등 동지들을 규합하여 문장 장날인 4월 8일 민중을 봉기시킨바 일대는 유혈사태까지 빚게 됐다.

그후 선생은 기산도, 김종택동지와 다시 만나 협의 후 장성군 황룡면장과 모의(謀議)하여 면사무소 등사판을 이용, 독립선언문 수천매를 등사, 전남북 전역을 순회 배포하고 독립사상을 고취였다.

이와 함께 독립자금을 모금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전달하는 등 조국광복에 공헌했다.

또한 선생은 영암의 한민수, 이규갑, 안상덕, 나주의 이계술동지와도 협력 인천만국공원대회에서 한성정부 조직에 참가하여 결의하고 상해 임시정부요원으로 국내외를 오가며 활동하다 1919년 10월 28일 장성군 황룡면 월평리에서 기산도, 김종택동지와 함께 체포되어 광주검사국(검찰청)으로 송치, 악독한 고문취조를 당하고 재판에 회부되어 대구복심법원(고등법원)에서 2년 4개월의 선고를 받고 옥고를 치렀다.

선생은 1922년 2월 19일 형기를 마치고 풀려난 후 일제의 개성 강요에도 불굴하고 항일 투쟁을 계속 하던 중 형기를 마치고 출옥한 동지 조사현, 장정현, 정기연 등과 지방에서 청년운동 및 농민운동을 추진하면서 각 단체의 간부로 활동했다.

선생은 1924년 월남 이상재 선생이 추진하는 조선민립대학 발기위원으로 조선사회단체 중앙협의회 함평대표로 1925년 장정현, 이광 등과 같이 함평농민조합을 조직하고 농민의 복지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어 또다시 3년으 집행유예를 언도받고 요시찰 인물로 지목되어 보호감팔소의 가택수색과 억압취조를 받아 오면서도 일편단심 확고한 집념으로 초지일관 민족의 독립과 자유투쟁에 심혈을 경주하였으나 조국통일의 한을 안고 후예 2남 3녀와 미망인 김해 김일남 여사를 뒤로하고 1967년 1월2일 타계했다.

그후 독립유공자 포상으로 1982년8월15일 대통령표창을받고, 1985년 국가보훈처 후원으로 선생의 의적비 건립추진위원회를 결성 위원장에 광산군수 이현호(李炫鎬), 부위원장에 함평군수 정병섭(鄭炳燮), 위원에는 광산군, 함평군, 장성군 각계 人士들로 구성하고 의적비를 선생의 묘소에 세웠다.

선생의 묘소는 광산군 삼도면 양동리 선영하에 모셨다가 1988년 함평군 나산면 초포리 사촌으로 이장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