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입력 2002.03.14 17:04

양창국 선생(1884∼1910. 6. 2)

1909년, 국운은 날로 기울어 일제는 본격적으로 식민지화의 초석을 다지고 있을 때며 일제의 끈질긴 의병 토벌 전으로 인해 의병운동도 폐색이 짙어져 독립운동은 대규모 의병 구성보다는 유격전 현상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시점에 선생은 1909년 7월 하순경 이강산 의병부대에 입대해 활약하였다. 같은 해 8월 29일 함평군 대야면 내정리(현 월야면) 산중에서 유진(留陣)하고 있을 때 나주 헌병분견소 구밀파견소 밀정 이관안 최치도 박복남 등 4명이 주막을 경영하는 이양삼의 집에 온 것이 탐지되었다.

이들은 평소 이강산 의진에 막대한 피해를 끼쳐 오던 존재라서 꼭 제거되어야 했다. 선생은 동료 5명과 함께 이양삼의 집에 이르러 주민 2명의 협력 하에 그들을 난타, 타살하고 그 중 박복남은 산으로 연행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게 했다.

선생은 피신을 하였다가 더 이상 은신생활을 할 수 없게 되자 일경에 자수를 했고 그후 동료들과 재판에 회부되어 1909년 12월 25일 광주지방재판소에서 교수형을 선고받았다. 고등법원에 상고하였으나 1910년 4월 27일 끝내 형이 확정되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을 기려 1980년 건국포장을 추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