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입력 2002.03.12 17:04

기산 영수와 함평

함평은 함풍과 모평을 합해 현을 만들었던 1409년에 비로소 지어진 고을 이름이다.

함평은 예로부터 땅이 기름져 농사가 잘 됐고 특히 쌀의 맛과 질이 좋아 "함평 쌀밥만 먹은 사람은 상여도 더 무겁다"는 속담이 나올 정도였다. 또한 함평의 특징은 높은 산이 없다는 것이다. 고려말 공민왕이 함평에 와 서해를 바라보고 놀았다고 해 이름 붙여진 君遊山(군유산)이 해발 403m로 가장 높은 산이다.

그러나 함평에는 기산 영수로 불리는 명승지가 있다. 옛 조상들은 함평읍내 동북방향에 위치한 함평공원 둔덕과 그 밑 영수천을 중국 하남성 동봉현의 전설적인 땅에 비유하고 기산 영수라 칭했던 것이다.

중국의 역사는 요순으로부터 시작된다. 요는 BC 2367년 산서성 평양에 도읍을 정하고 50년간 왕위에 올라 선정을 베풀었다. 그러나 요임금때 같은 태평성대에도 세속을 싫어했던 소부와 허유라는 인물은 세상을 등지고 하남성 기산에 숨어살았다.

요임금에게는 단주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그 아들이 어질지 못해 자신의 뒤를 이어 임금자리를 맡아줄 만한 사람을 찾던 중 "기산에 숨어사는 소부와 허유가 임금자리를 맡을 만한 인물들이다"는 소문을 듣게 됐다.

요임금은 사람을 기산에 파견해 소부에게 임금자리를 맡아 줄 것을 요청했다. 이 말을 전해들은 소부는 펄쩍 뛰며 사람을 돌려보냈고 기산밑 영천에서 귀를 씻었다고 한다. 마침 이 때 소에게 물을 먹이려고 냇가에 온 허유는 소부가 귀를 씻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 까닭을 물었다.

이에 소부가 "나더러 임금을 하라고 하는 소리를 들은 이 귀가 불결해 씻는다"고 하자 허유는 끌고 왔던 소를 소부가 귀를 씻고 있던 냇가 위쪽으로 몰고 가면서 "나는 미물인 소에게도 소부가 씻은 더러운 물을 먹일 수 없다"는 말을 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소부와 허유라는 인물이 실존 인물인지는 알 수 없으나 후대에 기산 영천이라 하면 이 두 사람을 관련지어 생각하는 전설적인 지명이 됐고 현재 그와 똑같은 지명이 함평에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함평공원 부근을 언제부터 기산 영수라 불렀는지 알지 못한다. 단지 조선 세조때 세조의 왕위 찬탈을 못마땅히 여겨 벼슬을 버리고 이곳에 정각을 짓고 살았던 인물이 있으므로 "그가 지은 이름이 아닐까" 하고 추측할 따름이다.

세조때 이곳에 정각을 짓고 은둔 생활을 한 인물은 함풍 이씨 李岸(이안)이라는 사람이다. 그의 할아버지 이희림이 청주 판관을 지냈고 아버지가 提學(제학)을 지낸 연고로 이안은 단종 2년(1454년) 박팽년의 천거로 남부 참봉에 특채됐다. 그러나 이듬해 6월 세조가 조카인 단종의 왕위를 빼앗자 더러운 세상이라 한탄하며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함평에 내려와 정각을 짓고 "樓(루)가 높아 날아가는 기러기는 등만 보이고 루 아랫물이 맑아 헤엄치는 새우의 수염을 헤아리겠다"는 시를 읊으며 箕山之志(기산지지)의 생활을 했다.

얼마 후 조정에서 그의 인품을 알고 사헌부장령 벼슬을 내렸으나 자신을 소부와 허유에 비유하며 벼슬을 뿌리쳤고 20년이 지난 1474년 세상을 떠났다.

그의 후손들은 모두 벼슬길에 나서 아들은 정 5품인 부사직 벼슬을 했고 증손 대에는 대사간 벼슬을 지내기도 했다.

영파정은 이후로 세월이 흘러 퇴락해 흔적만 남았던 것을 1821년 그 자리에 다시 정각을 짓고 영수정이라 했고 1843년 다시 중수해 관덕정이라 했다. 지금도 영수천 옆에는 관덕정이 보이지만 현재 건물은 1966년 보수한 것이다.

기산은 시원한 바람이 부는 산줄기라고 불리는 산에 붙는 이름으로 함평읍 뒷산(147m) 전체를 가리키며 그 산맥이 함평읍에 이르고 있다. 또한 산모퉁이에는 함평천이 흐르고 있어 중국의 기산과 영천에 비유해 영수라 칭했으리라 짐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