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입력 2002.03.12 17:04

이강산(李江山 1874. ?∼1910. 6. 6)



선생의 본관은 함평이고 일명 돈익(敦益)이라 불렸고 자는 인국(仁國)이다. 시조의 25세손으로 효서(孝緖)의 아들로 월야면에서 태어났다.

본래 상업에 종사하였던 선생은 "대장부가 세상에 태어나서 위국진충(爲國盡忠)을 못 한다면 누가 대장부라 하리요"라는 노래를 지었고 평소 가지고 다니는 칼에도 '위국진충'을 새겼다.

선생은 각 곳에서 의병이 일어나자 처음에는 김태원(金泰元)의 막하에서, 다음에는 조경환(曺景煥)과 함께 항일 전을 펴다가 전해산(全海山)부대와 합류하여 전공을 세웠다.

전해산의 부대가 해산하자 1909년 7월 하순 박치일 양창국 등 20여명과 독립 부대를 창설하여 대장이 되었고 불갑산을 근거지로 함평 영광군 등을 종횡하며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날이 갈수록 왜적들은 악랄해져 선생의 가족들에게 만행을 자행하였으며 헌병 밀정들의 횡포는 눈뜨고 볼 수 없는 지경이었다.

1909년 8월 29일(음 7.14) 선생이 대야면 내정리(현 월야면) 산중에 잠입해 있을 무렵, 나주 헌병대 구밀(求密. 현 해보면 문장리 귀밀-歸密)파견소의 악질 밀정 이판안(李判安) 김정태(金正泰) 최치도(崔致道) 박복남(朴福男) 등 네 명이 구밀에서 주막을 경영하는 이양삼(李良三) 집에 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의 평소 소행에 대한 원한을 씻기 위해 쟁기의 파편과 몽둥이를 들고 급습하여 이판안 김정태 최치도는 그 자리에서 즉사시키고 박복남은 내정리의 산 속으로 연행하여 자결하게 하였다. 조국을 배반한 대가가 무엇인가를 보여 준 것이다.

이 때 합세한 의병은 박치일(朴致一 월야면 29세) 정인술(鄭寅述 월야면 36세) 박장봉(朴章奉 해보면 30세) 서성학(徐成學 월야면 46세) 양창국(梁昌國 36세) 박병수(朴炳洙) 등 8명이었다.

선생과 위의 박병수를 제외한 5명이 함께 체포되어 1909년 12월 25일 광주지방재판소에서 폭동 및 모살 죄로 교수형이 언도되어 항소를 하였으나 1910년 3월 8일 대구공소원에서 기각되어 원심대로 사형이 확정되었다.

선생과 박치일 등은 1910년 6월 6일 형이 집행되어 순국하기에 이른다.

조국을 위해 싸우다 순국한 이들은 후세에게 '월야의 6의사(六義士)'로 추앙 받고 있으며 37세의 나이로 순국한 선생의 장한 얼을 기리기 위하여 1977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 되었고 해보면 금덕리 묘소에는 목포 원호지청 주관으로 묘비가 세워졌다.

아내는 진주 강찬중(姜贊仲)의 딸이며 후사(後嗣)가 없으므로 손녀인 이금순(李今順)이 제사를 모시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