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입력 2020.08.27 10:09

김 철 수

본지 상임고문•美솔로몬대학교 한국학장

올해로 우리민족은 광복75주년을 맞았다. 영토와 국민은 있으되 주권을 일제에게 강탈당한 뒤 유리걸식하며 전 세계를 방황하던 우리민족의 처지와 삶이 얼마나 비참했는지는 상상만 해도 몸서리처지는 일이다. 일본의 그 간악성과 잔인했던 35년간의 압제를 우리민족은 비록 용서할 수는 있어도 결코 망각하거나 잊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해마다 대한민국에서는 8•15일이 되면 이날을 광복절이란 이름으로 국가기념일로 지키며 지난날을 되새기는 것을 자손만대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오고 있다. 우리민족이 그렇게 되기까지의 치욕스럽고 부끄러운 경술국치도 금년으로 105년째가 된다. 그런데 200만 명의 우리 동포가 살고 있는 중국의 연변조선족자치주에서는 그 감격스러운 광복절을 제대로 지킬 수가 없어 가슴앓이를 하며 살아왔다. 그것은 중국의 56개 소수민족 가운데 하나인 ‘조선족’이라는 이름을 가진 중화인민공화국의 공민이기 때문이다. 누구보다도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서 목숨 걸고 일제와 싸웠고 많은 피를 흘린 독립투사들의 후예들이지만 그 감격과 기쁨을 마음속으로만 간직할 수밖에 없었던 것인데 언제부터인가 해마다 중국 땅 연변조선족자치주에서는 8월15일이 되면 광복절이 아닌 ‘노인절’이란 이름으로 우리 동포들이 모여 잔치를 벌였다. 비록 국적은 중화인민공화국 공민이지만 우리글과 우리말을 당당하게 가르치고 배우면서 지키는 재중 동포들이 지난 1982년 8월15일 백두산 자락 밑 연변조선족자치주 동성촌에 약 2,000여명이나 모였다. 그리고 젊은이들은 맛있는 음식을 장만해놓고 노인들을 위한 잔치를 열어 노래와 춤으로 흥을 돋았다. 그리고 이러한 행사는 다음해 8월15일에도 여전히 조선족 노인들을 모셔다놓고 젊은이들과 어린이, 그리고 온 가족들이 함께 모여 합동생일잔치를 열었다. 겉으로는 누가 봐도 우리민족의 고유미덕인 경노사상을 고취하는 효도잔치였지만 사실은 일제로부터 해방되었던 광복절의 기쁨과 감격을 영원히 간직하고 후손들에게 물려주고 싶은 마음에서 시작된 연변의 광복절 기념행사였던 것이다. 그 후 3년이 지난 1985년 8월15일부터는 연변조선족자치주 인민정부에서 이날을 아예 공식 공휴일로 지정하고 이날을 노인절로 지정해 효도선양과 함께 우리민족들이 함께 모여 결속과 우의를 다지는 계기로 삼게 되었다.

그러니까 금년에 45주년째가 된다. 조국광복의 벅찬 감격을 자손대대에 이르기까지 계승 발전시키기 위해 이 날을 법정공휴일로 정해주도록 주창한 사람은 용정시에 살았던 독립투사 후손인 고 김재권 한글도서관장이다. 그는 스스로 자신을 등 굽은 가시나무라고 불렀다. 바르고 곧게 자란 나무들은 모두 베어져 다른 곳으로 팔려나가고 조상의 묘를 지키며 고향을 지키는 나무는 상품으로서 값어치도 없고 별 쓸모가 없이 구부러져 있듯이 자신의 처지와 형편이 이와 같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고 김재권 선생은 누구든지 조상의 묘를 훼손시키거나 고향산천을 못살게 구는 자에게는 날카로운 가시로 목숨을 다해 지키겠노라는 각오가 대단했다. 그의 눈부신 활약과 뜨거운 민족사랑은 그의 가슴과 머리, 그리고 손끝에서 이루어졌는데 민족시인 윤동주 생가의 복원과 명동교회의 복원, 그리고 용정시내의 성결교회 복원 등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선구자의 노래비가 세워진 비암산의 일송정과 일대에 건립된 시인들의 시비건립도 모두 그의 땀과 철학 속에서 이루어진 민족유산의 열매들이다. 그가 세 번의 질병과 게 차례의 교통사고로 인해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면서도 그 때마다“ 하나님이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유익한 일을 좀 더 하다가 오라고 하더라.” 며 불사조처럼 다시 일어나 일해 오다가 결국 수년전 이 세상을 떠난 독립투사요 문화투사이다. 그는 비록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심혈을 기울여 주창한 연변의 노인절은 올해도 양력 8월 15일이 되면 백두산 자락 및 동성촌에서 열리는 연변의 노인절이 대한민국의 해방의 감격을 노래할 것이고 재중 동포들의 가슴에는 또 다시 나라와 민족에 대한 사랑과 일제의 잔혹성을 잊지 않고 기억케 하는 기폭제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