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입력 2020.06.26 10:25

김 철 수 박사

본지 상임편집고문•미솔로몬대학교 한국학장

원호의의 달 6월이 영글어간다. 그동안 평화로 위장하고 있던 북한의 본색이 남북공동연락소의 일방적 폭파로 들어나면서 6.25 한국전쟁 발발 70주년을 맞는다. 그렇지 않아도 2020년은 중국 후한시에서 발발한 ‘코로나19’ 라는 펜데믹 바일러스 전염병이 전 세계를 휩쓸며 불안과 공포속에서 평상적인 삶의 리듬을 깨트리고 우리사회 전반에서 감당하기 어려운 일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고 있다. 이 힘들고 어려울 때 일수록 무엇보다도 가족의 소중함을 절실하게 깨닫게 된다. 오랜 세월동안 국민가요 수준에 이를 만큼 일제 강점기시절부터 남녀노소 누구나 할 것 없이 즐겨 부르던 동요로 ‘오빠생각’과 ‘고향의 봄’이 있다. 이 두곡의 동요는 일제의 강점기 시절인 1925년과 다음해인 1926년에 세상에 빛을 본 작품들이다.

뜸북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 / 뻐꾹 뻐꾹 뻐꾹새 숲속에 울제 / 우리 오빠 말 타고 서울 가시면 / 비단구두 사가지고 오신다더니 / 기럭기럭 기러기 북에서 오고 / 귀뚤귀뚤 귀뚜라미 슬피 울건만 / 서울 가신 오빠는 소식도 없고 / 나뭇잎만 우수수 떨어집니다.

이 동요는 수원출신인 최순애 선생이(1914-1998) 12살 소녀시절인 1925년 11월에 지었다. 이 노랫말을 지어질 당시에는 일제가 우리민족에게 가장 심한 억압을 하던 시기이다. 작사자인 소녀 최순애는 당시 소파 방정환 선생이 발행하던 『어린이』잡지에 이 시를 발표했고 당시 유명한 작곡가인 박태준(1900-1986)선생은 그 가사의 사연에 감동을 받아 작곡을 하여 8분의6박자의 노랫가락에 표현한 애상조의 멜로디는 당시의 어린이들의 심정을 잘 표현하여 모든 연령층이 한 결 같이 즐겨 부르게 된 것이다. 최순애 선생은 그동안 써왔던 작품들을 모아 동시집을 출간하려고 원고를 준비했는데 6.25전쟁 중에 그만 불타버린 바람에 남아있는 작품은 몇 편 되지 않는다. 그리고 다음해인 1926년 4월 『어린이』 잡지에 당시 14세의 소년 이원수선생이 <고향의 봄>으로 주인공이 되었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 울긋불긋 꽃대궐 차린 동네 /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 꽃동네 새 동네 나의 옛고향 / 파란 들 남쪽에서 바람이 불면 / 냇가에 수양버들 춤추는 동네 /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이 시는 홍난파 선생이 작곡을 하여 불리어졌는데 이 동요에 크게 감동을 받은 수원에 사는 소녀 최순애가 경남창원에 사는 소년 이원수에게 편지를 띄우기 시작하면서 둘 사이는 펜팔친구가 되었고 서로 얼굴도 모른채 결혼까지 약속하기에 이르렀다. 펜팔을 통해 7년이란 세월을 보낸 뒤 두 사람은 어느 날 수원역에서 처음 만나기로 약속했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이날 이원수가 수원역에 아무 연락도 없이 나타나질 않았다. 훗날 알게 되었는데 당시 이원수는 독서회를 통해 불온한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1년 동안이나 감옥살이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두 사람은 이원수가 감옥 에서 출감했지만 최순애의 부모는 심한 결혼반대를 했다. 그러나 최순애의 완강한 거부로 1년을 버티다가 1936년 6월 마침내 결혼식을 올리고 가정을 이루어 슬하에 3남3녀의 자녀를 낳아 기르며 행복하게 살게 되었다. 이원수는 경상남도 양산읍 복정리에서 1912년1월5일에 출생했고 태어난 지 10개월 후 경남 창원읍 중동리 100번지로 이사, 이곳에서 10년을 살았다. 1930년 마산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함안가야 금융조합에 재직하다가 서울로 올라가 본격적인 문학 활동에 전념했다. 그의 작품은 초기의 율동적이며 감각적인 경향에서 1940년대 지은 <어머니>는 저항적 현실의식이 강하게 반영되었고 6.25 동란 이후에는 동요와 동시보다는 동화와 아동소설에 주력하여 현실을 직시한 고발적 사실주의 아동소설을 주로 발표하였다. 최순애 선생은 훗날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그가 노랫말을 짓기 시작한 동기를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그 당시 나에게는 오빠 한 분이 계셨습니다. 딸만 다섯에 아들이 하나뿐인 우리 집안에서 오빠는 참으로 귀한 존재였습니다. 오빠는 동경으로 유학을 갔다가 관동 대지진 후 조선인 학살 사태를 피해 가까스로 고향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날 이후 일본 순사들이 늘 요시찰인물로 오빠를 감시했습니다. 오빠는 고향인 수원에서 소년운동을 하다가 서울로 옮겨 방정환 선생 밑에서 소년운동과 독립운동에 전념을 다했습니다. 오빠가 가끔 집에 올 때면 늘 선물을 사오셨는데 한번은 그냥 빈손으로 와서 다음에 올 때는 고운 댕기를 꼭 사다 줄께 약속하고 서울로 떠났습니다. 그러나 오빠는 뜸북새와 뻐꾹새 등 여름새가 울 때 떠나서 기러기와 귀뚜라미가 우는 가을이 와도 집에 돌아오지를 않았습니다.” 과수원집 딸인 순애가 오빠를 과수원 밭둑에서 서울방향인 서쪽하늘을 바라보며 기다리다가 해가지면 눈물을 훔치며 집으로 돌아오기가 일쑤였던 것이다. ‘오빠생각’과 ‘고향의 봄’이 『어린이』라는 잡지를 통해 서로 펜팔을 하고 마침내 부부가 되어 가정을 이루어 행복하게 살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