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입력 2015.09.21 18:26
<강경호 시인의 추억의 창-39>

추석 명절 때가 다가오면 마을 이장네 감나무에 매달린 확성기에서는 ‘한가위 노래자랑’을 안내하는 방송이 나오곤 했다. 이때쯤 마을의 청년들은 노래자랑 무대를 만들고 상품을 마련하는 등 부산하게 축제를 준비하였다.

노래자랑은 주로 추석 전날 밤에 열렸다. 서울이나 객지에 돈을 벌려고 나갔던 처녀 총각들이 고향에 돌아와 마을은 활기를 띠었다. 1960년대에는 ‘무작정 상경’이라는 영화가 만들어질 정도로 서울로 올라가 공장에 취직한 젊은이들이 많았다. 그러다가 설이나 추석 명절이면 고향에 내려와 일가친척들에게 인사를 드리고 선물을 하고 성묘를 하였다. 그래서 귀성열차는 언제나 미어터지게 북적대고 서울에서 전라도 고향까지 열 두 시간 걸렸네, 열다섯 시간 걸렸네 하였다. 고향에 돌아와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나니 즐겁지 않을 수 없어 노래자랑에 나가기도 하고 구경도 하였다.

큰 누님은 동네에서도 유명한 명가수였다. 누님은 다른 동네 콩쿠르에 나가 상을 타오곤 했는데 그때는 양은솥, 시계, 밥그릇이 주된 상품이었다. 그래서 우리 집에서는 그릇을 사지 않아도 되었다. 누님이 콩쿠르에 나가면 무조건 상품을 타오기 때문이다. 누님이 무대에 오르면 청년들은 휘파람을 불었다. 부끄러움을 잘 타는 수줍은 누님은 머쓱한 표정으로 노래를 시작했다. 그러나 노래에 빠지면 이미자 뺨치게 노래를 잘 불렀다. ‘열아홉 순정’이나 ‘섬마을 선생’을 잘 불렀는데 누님의 노래가 끝나면 “앵콜! 앵콜!” 하는 소리가 터져 나오곤 하였다.

콩쿠르를 준비하는 청년들 중에는 기타를 잘 치는 사람이 있었다. 어디서 구했는지 요란한 옷을 입은 청년들이 노래자랑 출전 선수가 노래를 부르면 기타반주로 흥을 돋구었다. 폼이라고 생긴 폼은 다 내면서 기타연주를 했는데 그 모습에 콩쿠르는 흥겨운 마을 축제가 되는 것이었다.

콩쿠르의 심사는 마을 이장과 어른들 중에서 맡았다. 옷을 어떤 것을 입었는지, 무대매너는 어떤지, 그리고 노래 실력은 어떤지를 보아 점수를 주고 등수를 매겼다. 어떤 처녀는 평소 점잔을 빼곤 했는데 무대에 올라와서는 난리를 치면서 온갖 끼를 발산하기도 하고, 어떤 청년은 돼지 멱따는 소리로 노래를 불러 마을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고, 마을 할머니는 심청이 인당수에 빠지는 소리를 불러 구경꾼의 애간장을 다 녹이기도 하였다.
콩쿠르가 벌어지는 동안 마을 사람들은 저녁밥을 먹고 콩쿠르가 열리는 마을 앞 가설무대로 몰려들어 자리를 잡는다. 누구네 집 자식이 노래를 잘 부르는지, 아무개가 서울에 갔다가 얼굴을 내보이는지를 알 수 있는 추석 무렵의 콩쿠르는 온 마을 사람들이 함께하는 유일한 잔치였고, 사람들의 소식을 알 수 있는 소통과 친교의 마당이었다.

콩쿠르를 통해 누구누구가 눈이 맞았다는 소문이 퍼지기도 하였는데, 그 옛날 콩쿠르는 주로 청년들의 소통의 장이었던 셈이다. 또한 그 시절 가장 현대적인 문화의 마당 역할도 담당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제 어느 마을에서 추석 무렵에 콩쿠르를 여는지 모르겠다. 그 옛날의 콩쿠르 같은 것은 거의 사라지고 사람들은 텔레비전 앞에 앉아 텔레비전에서 방영하는 추석특집 프로그램을 본다. 온 마을을 들썩이는 흥에 빠지게 했던 콩쿠르는 옛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양은솥 상품을 타오던 처녀들도 모두 할머니가 되어버렸다.

디지털 시대의 문명은 갈수록 자본화되고 비인간화되어가고 있다. 이러한 시대에 옛 콩쿠르 무대에서 울려 퍼지던 마을 가수의 어설픈 노랫소리가 그리워진다. 세련되지 않은 노래이지만 함께 울고 웃었던 농경사회의 추억이 더욱 그립게 다가오는 것은 단순한 향수가 아니다. 옛 콩쿠르에서 들려오던 노랫소리 속에는 따스하고 애틋한 인간의 정이 배어 있고, 화장하지 않은 인간의 맨 얼굴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