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입력 2015.07.14 15:08
갈꽃마을 푸른 바다 위에 억순 아짐 이회순 씨(목포제일정보중학교 3학년, 54세)의 걸걸한 목소리가 날아든다. 완도군 노화읍 동천리 바닷가. 트럭에서 내린 회순 씨는 능숙하게 모터배를 운전해 바다 한 가운데 가두리 양식장까지 몰고 간다.
깊고 푸른 바다 속 가두리에서는 크레인으로 끌어올린 전복판에 열 댓명 아낙이 모여 날카로운 칼과 가위를 들고 전복을 따서 선별하는데, 천수관음상 처럼 50여개의 손바닥을 벌린 전복저울이 윙윙 소리를 내며 빙글빙글 돌고 있다.
전복 선별작업은 벌써 한창이다. 한 2 년 바다 속에 살다보면 전복껍질 위에는 어느새 굴이 집을 짓고 공생한다. 간간히 둥근 부채모양의 빨간색 가리비도 들어와 한 가족이 된다. 이 굴의 무게는 전복을 판매할 때 영향을 주기 때문에 잘 떼어내야 한다. “사살만 까지 말고야 지푸라기 잠 잘 골라야아.” 집중해서 전복을 잘 선별하라는 주인 아짐 회순 씨의 목소리가 푸른 바다 위에 퍼진다.
부지런히 전복을 저울대에 올리면 무게에 따라 각각의 바구니에 내려놓는다. 차곡차곡 무게별로 나뉜 전복 박스가 쌓여간다. 희망도 커간다.

바다 속에 감춰진 보석. 전복. 한 때 김 공장이 잘 될 때는 직원들도 많았지만 사업이 확장되면서 관리를 제대로 못해 재래 김발틀이 나오면서부터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대학교에 다니던 아들들은 휴학을 하고 군에 입대했다. 빚에 눌려있던 이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회순 씨를 구해준 것은 전복이었다.

아침 햇살이 바다 위에서 부서진다.
바다에 무수한 보석이 반짝인다.

2002년 32칸 치패(새끼 전복) 5만미로 전복을 키우기 시작했다. 전복 치패를 외상으로 구해 시작한 전복가두리 양식이 몇 해 동안은 돈만 들어갈 뿐 수입이 없어 많이 참아야했다. 서울에서 공부하던 아들들은 하숙, 자취, 고모집, 이모집 고생도 많이 했고 한 번씩 완도에 내려오면 여비마련해 줄 것이 걱정되던 때였다. 때 마쳐 누가 전복을 산다고 하면 얼마나 반갑고 고마웠던지 그 전복이 아들들 대학을 졸업시켰고 오늘 회순 씨까지 학교에 보내준다.

‘눈 못 뜬 엄마들 눈 뜨게 한다.’는 한글공부학교 유치
갈꽃섬 노화도에서 회순 씨는 1997년부터 2007년까지 몇 년 동안 마을 부녀회장을 맡아했다. 이 때 처음 한글학교를 노화에도 들여왔다. 처음에 옆마을 사람들이 일하는 틈틈이 한글공부를 하는 것을 알았을 때 참 많이 부러웠다. ‘눈 못 뜬 엄마들 눈 뜨게 한다.’는 한글학교를 보면서 회순 씨의 마을에도 한글 공부하는 곳을 마련하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2년에 걸쳐 이장 일을 보던 남편과 함께 선생님을 찾아가 간청하여 노화 마을에도 한글학교를 시작했던 것이 이제는 학력인정 노화평생한글학교가 되었다.
섬마을 노화에는 한글을 모르는 어른들이 많았다. 옷가게를 하는 아짐씨는 한글학교를 통해 장사에 많은 도움을 받는다고 한다. 그전에는 옷을 외상 주고도 장부에 적지 못해 본인만 아는 그림을 그려 표시했었는데 글을 배우고 나서 이름을 적어 놓을 수 있다고 자랑스러워한다.

한글공부를 하면서 갈꽃마을 노화에 작은 변화가 생겼다. 전화를 하려고 해도 늘 옆 사람에게 부탁하던 분이 전화번호부에서 이름을 찾아 혼자 전화할 수 있게 되었고, 본인 서명란에 서명을 못하던 분이 본인 이름을 척척 쓰게 되었다. 한글 보조교사였던 회순 씨는 학습자들을 노래방에 모시고 갈 때가 많았다. 이제까지 노래방에 가본 적이 없는 사람들, 한글을 읽을 줄 모르니 노래방 자막이 무용지물이었던 한글공부 학생들을 모시고 노래방에 가서 흥겹게 노래 부르며 한글도 익힐 수 있는 자리를 만들었다. 한글 자막을 보며 노래하는 할머니들을 보면 마음이 뿌듯했다. 그러면서 회순 씨도 영어를 공부하고 싶은 욕심이 생겼으나 막연한 욕심일 뿐 어디서 어떻게 시작해야할 지 갈증만 느끼고 있었다.

“가이나 새끼가 배워서 뭐 할라고” 이후 30여년
목포제일정보중학교 학생이 되어

초등학교 졸업 무렵 가슴에 한이 되었던 “가이나 새끼가 배워서 뭐 할라고”는 30여 년간 회순 씨 주위를 맴돌았다.
하루는 미용실에 갔더니 주인 아줌마가 어른들이 공부하는 목포제일정보중고등학교에 다닌다며 한자를 쓰고 있었다. 이제까지 본인도 모르게 숨겨져 있던 공부에 대한 꿈이, 지나던 바람에 꺼진 불씨가 되살아나듯 살아났다. 하지만 생업이 있는 사람이 그것도 노화섬에서 목포 학교에 다닌다는 것이 보통 결심으로는 힘들었다.
더군다나 당시 남편이 광주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남편과 상의하니 남편은 적극적으로 지지해주었다. 고민 끝에 입학한 중학교 생활, 밤에는 광주 병원에서 남편 간병을 하고 아침에는 학교에 와서 공부를 하면서 며칠에 한 번 씩 완도에 들어가 전복 일을 하자니 너무 벅차고 힘들었다. 그러나 너무나 배우고 싶었기에 참아낼 수 있었다.
남편의 몸이 빨리 좋아지지 않아 속으로는 애가 타고 마음이 아파도 큰 소리로 웃다보면 이겨지고, 속으로는 근심이 하나 차 있어도 하하하 웃다보면 풀려지는 생활이었다. 좋아서 웃는 게 아니라 웃었기 때문에 이겨낼 수 있는 시간들이었다.

전복양식을 시작한 지 13년. 이제 두 아들이 전복 일을 모두 맡아 해주지만 아직도 판매, 선별, 다시마 종묘 감을 때는 억순 아짐 회순 씨가 꼭 필요하다. 이런 날을 빼고 전복은 아예 자식들에게 맡기고 학교에 다닌다.
활달한 성격의 회순 씨는 마을의 행사가 있으면 언제나 그 가운데 있다. 마을 노인들을 모시고 관광버스를 빌려 여행을 다녀오기도 한다. 올 봄에도 노인들을 모시고 진도로 꽃게를 먹으러 다녀왔다. 멀리 사는 자식들 대신 가까운 이웃이 자식 노릇을 하는 것이다. 회순 씨의 재치 있는 우스개소리에 할머니들 합죽한 얼굴에 웃음꽃이 물결진다.

중학교 3학년 이회순 씨는 요즘 행복하다. 남편은 퇴원해서 회순 씨 곁으로 돌아왔고 내년이면 여고생이 된다. 폭풍이 지나고 보니 바다가 한층 더 찬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