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입력 2014.03.25 17:35

<강경호 시인의 추억의 창-28>

정월이 되면 아무리 눈이 많이 내려도 봄이 가까워짐을 느낄 수 있다. 이는 귀로 듣는 봄이 오는 소리뿐만 아니라 몸으로도 봄이 오는 소리를 듣는 것이다. 꽃샘추위가 봄소식을 훼방 놓는다 해도 훨씬 부드러워진 눈의 질감에서 남해바닷가 어디께를 북상하고 있는 봄의 입김을 느낄 수 있다. 차디찬 물속으로 곤두박질쳤다가 물 위로 얼굴을 내미는 비바리들이 내쉬는 휘파람소리가 아니라도 봄이 오는 소리는 지척에서 들려온다.

바닷가 물빛은 푸르러지고 쌀쌀한 바람결이지만 어딘가 푸근한 느낌이 볼에 느껴진다. 이때 백사장으로 밀려오는 밀물소리는 마치 천군만마의 말발굽소리처럼 위풍당당하다. 겨우내 꽁꽁 얼었던 바다의 마음이 얼음장 녹듯 풀릴 때, 어부들은 겨우내 백사장에서 건조하던 배의 마지막 망치질을 해댄다. 찢겨진 그물코도 기워 바다에 나갈 꿈을 꾼다.

이때쯤 물 빠진 갯벌에 나가면 게들이 쏘다니는 소리가 분주하다. 우리 마을 바다에는 주로 참게와 농게가 많이 서식하고 있는데, 사람이 다가가면 갯벌에서 놀다가 제 구멍 속으로 얼른 들어가 버린다. 유년에 나는 아랫동생과 함께 삽과 양은주전자를 들고 바닷가로 나가곤 하였다. 동생은 몸이 건강해 추운 갯벌에 맨발로 다니면서 금방 구멍 속으로 들어간 게를 잡기 위해 삽질을 해댔다. 입에서는 하얀 김을 내뿜으면서 연신 삽질을 해대는데 쭈그러진 주전자를 들고 동생을 따라다니며 나는 추위에 몸을 사렸다.

겨울 게들을 볶아먹으면 무척 맛이 좋다. 입안에서 게의 통이 ‘와삭’ 하는 소리를 내며 깨질 때는 희열을 느꼈다. 이러한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나는 정월 말이 되면 눈이 소복하게 내려도 고향바다에 가 삽으로 게를 잡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유년에 함께 바닷게를 잡던 동생은 국가대표 레스링 선수까지 한 건강한 몸이었지만 이제는 이승에서 만날 수 없다. 바닷가 가까운 곳에 묻혀서 바람소리와 파도소리를 듣고 있으니 인간의 삶이 참으로 무상하다.

겨울이 깊을수록 봄이 멀지 않음을 우리는 잘 안다. 바다에 얼었던 얼음장이 고향마을 바닷가 갈대밭 언저리에 밀려왔는데 엄청 두껍다. 그러나 바닷물이다보니 두께만 두꺼울 뿐 발로 밟으면 푸석푸석 부서지곤 했는데 그것들이 파도에 부딪칠 때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소리가 났다. 이렇듯 지독한 추위가 몰려오는 날은 어린 우리들은 새벽 일찍 바닷가로 나가곤 하였다. 간밤에 해변가에서 얼어죽은 청둥오리를 줍기 위해서이다. 일찍 일어난 자만이 기러기 한 마리, 또는 두 마리를 바닷가에서 주을 수 있었다. 철새인 기러기는 저녁 무렵 고향마을 창공으로 열을 지어 산을 넘어가곤 하였는데, 어떤 때는 길 잃은 기러기 한 마리가 기러기들이 날아간 쪽으로 불안하고 허둥대는 소리를 내며 좇아가는 때도 있었다.

봄이 오는 소리는 아직 녹지 않은 눈 속에서도 들려왔다. 따스한 햇빛이 비치는 양지녘 눈 속을 파헤치면 여리지만 강인한 푸른 뼈를 가진 쑥이 자라고 있다. 겨울 추위가 매서울 수록 쑥향은 진해지는데, 보리밭 위로 일렁이는 바람속을 휘젓고 돌아다니는 아이들도 건강하게 자신의 생을 이끌고 가는 것이다.

정월 보름쯤이면 봄이 오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마을 뒷산 당산뫼에 있는 우리 산을 뒤지면 전국에서 가장 유명한 함평 민춘란이 바람결에 보리밥알 같은 하얀 꽃잎에 검붉은 색깔을 띤 채 방울소리를 내는 것이다. 이제 민춘란이 향기를 피워 올리다보면 꽃샘추위 쯤이야 아무것도 아니다. 짧은 이월도 가고 나면 남녘으로부터 꽃향기가 귀를 어질어질하게 한다. 그래서 무슨 축포를 쏘는 양 사방에서 겨우내 실탄을 장진했다가 터뜨리는 봄 신고식 같은 총소리가 사방에서 튀밥튀는 소리처럼 들려온다.

얼음장 밑으로 들려오던 빙벽 같았던 혹한을 녹이던 계곡물도 어느덧 힘차게 바다로 달려가면, 우리 아버지, 어머니, 마을의 농삿꾼들은 한 해 풍년농사 짓겠다고 순해진 눈빛으로 연장들을 단속하곤 하였다.

바다에선 썰물 따라 주포항구에서 발동선들이 ‘통통통’ 환호를 지르며 겨우내내 항구에 갇혀 있다가 해방된 듯 먼 바다로 나가곤 하였다.

이제는 모두가 수십 년 전의 전설 같은 추억들이지만 여전히 봄의 문턱에서 나는 봄의 소리들을 들으며, 그 옛날처럼 마음이 들뜨는 설레임을 감출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기억은 나만의 것일지도 모른다. 자라나는 청춘들에게는 봄이 오는 소리에도 감흥이 있는지 모르겠다. 내일 모레가 정월 대보름이다. 마을 구석구석을 돌며 한 해 무병장수와 풍년을 기원하던 봄의 전령사, 농악패들도 모두 죽고, 늙어 이제는 풍악소리마저 들을 길 없다.

나이가 들수록 옛것들이 그리워지는데, 구순이 다 된 어머니는 늙어 갈 수록 무장무장 마음만 푸르러져 인생의 봄날에 불렀던 노랫가락 잊지 않고 새로운 봄을 꿈꾸시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