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입력 2014.02.13 14:49

<강경호 시인의 추억의 창-26>


옛날엔 가을하늘이 유난히 푸르고 높았다. 오늘날은 대기오염 등 환경오염으로 하늘은 뿌옇고, 산에 올라 도시를 바라보면 도시가 스모그 때문에 침침하게 보인다. 비가 개인 후 어쩌다 운 좋은 날 바다 건너 마을이 청명하게 보일 정도이다.

옛날엔 금수강산으로 불리던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풍경과 더불어 물이 맑고 공기도 맑고 하늘도 맑았다. 특히 가을은 ‘천고마비의 계절’이라고 불릴 정도로 하늘이 높고 푸르렀다. 겨울이 깊어 가면 북쪽에서 찬바람을 타고 철새들이 날아왔다. 먹을 것이 풍부한 우리나라의 강이며 산, 그리고 바다에서 겨울을 지내다가 봄이 오면 다시 북쪽으로 날아가곤 했다.

특히 기러기는 떼를 지어 남쪽으로 내려왔다. 이들은 군인들처럼 대열을 지어 날아다녔는데, 우리 동네에서는 왠지 잘 모르겠지만 새벽이면 마을 뒷산을 넘어왔다가 낮 동안에는 바다에서 머물렀다. 먹잇감이 많은 바다에서 활동하다가 밤이 되면 뒷산을 넘어 어디론가 둥지를 찾아가곤 했던 것 같다.

동네에서 저녁밥 짓는 연기가 온 마을을 하얗게 덮을 무렵이면 기러기가 ‘끼루룩 끼룩 끼루룩’ 소리를 내며 북쪽 하늘로 날아갔다. 기러기는 보통 새들과는 달리 하늘 높이 떠서 날아가곤 했다. 맨 앞에 길잡이 대장 기러기가 서고 그 뒤에 무리가 뒤따라 날아갔다. 무리는 Y자를 옆으로 돌려놓은 모양으로 대열을 짜서 날아가는데 무슨 병법에 의해 편대를 짠 것처럼 느껴졌다.

서정주 시인은 「동천(冬天)」이라는 시에서 초승달 뜬 밤하늘에 기러기가 날아가는 모습을 “그것을 알고 비켜 가더라”는 의미로 해석하였다. 날카로운 비수 모양으로 하늘에 떠 있는 달에 몸이 상할까봐 기러기가 그것을 알고 비켜갔다는 내용이 참으로 아프게 가슴에 박혔다.

밤하늘을 나는 기러기 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짠해졌다. 하루를 마감하며 고단한 날개를 펄럭이며 어두운 북쪽 하늘을 날아가는 모습에서 인간의 고단한 삶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목을 쭈욱 내밀고 다리를 뒤로 반듯하게 펴서 날아가는 기러기의 가냘픈 목덜미가 슬프다는 생각도 들었다. 기러기를 자세히 보면 다리가 발달되지 않아서 잘 걷지 못한다. 물 위에서 비상할 때도 요란한 날갯짓과 물소리가 비상의 서툼을 느끼게 해 준다. 그러므로 기러기는 오직 인간 세상과 먼 장천에서 천천히 날개짓할 때 자유스럽다. 기러기가 지상에 있을 때는 언제나 위태롭고 불안하게 보이는 것이다. 이런 기러기를 바라보는 마음은 편치 않았다.

어떤 날 저녁때는 기러기 떼가 ‘끼룩 끼루룩 끼룩’ 하고 날아가 버린 후 한참 늦은 밤하늘에 혼자서 날아가는 기러기를 본 적이 있다. 무슨 사연이 있어 혼자서 늦게 둥지를 찾아 가는지는 모르지만 애처로운 생각이 들었다. 빈 하늘에 달만이 교교하고 적막 속에 떠 있는데 갑자기 하늘에서 날개치는 소리가 들려 바라보니 혼자 날아가는 기러기가 가엾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기러기를 바라본 시인들의 심사는 대부분 고단한 인간사와 견주어 노래했는지도 모른다.

70년대의 어니언스가 부른 「작은 새」라는 노래가 크게 유행했다. “고요한 밤하늘에 작은 새 하나가 바람결에 머무는 그곳에는 길 잃은 새 한 마리 집을 찾는다. 세상은 밝아오고 달마저 기우는데 수만 리 먼 하늘을 날아가려나. 가엾은 작은 새는 남쪽하늘로 그리운 집을 찾아 날아만 간다.” 곡조는 물론 가사도 우울하고 답답한 70년대의 사회분위기가 느껴지는 이 노래에서의 ‘작은 새’는 기러기가 틀림없다.

겨울 아침이면 바닷가 아이들은 새벽 일찍 일어나 해안선을 달려갔다. 날씨가 너무 추워 밤새 얼어 죽은 기러기를 주우러 가는 발길들이었다. 기러기에 대한 연민과는 다르게 배고픈 시절 기러기 고기는 단백질과 지방을 보충해 주는 훌륭한 먹거리였다. 어쩌다 바닷가에서 얼어 죽은 기러기를 줍는 일은 오늘날 로또에 당첨된 것 마냥 횡재였고, 한동안 아이들 세계에서는 재미있는 무용담이 되어 주었다.

오늘날엔 기러기 떼도 많이 수가 줄어들었다. 철새 도래지에나 가서 망원경으로나 볼 수 있는 새가 되어버렸다. 그 옛날 겨울이 되면 왠지 모를 서러움과 외로움을 전해준 목이 길고 눈매가 깊어 외로워 보이는 새는 이제 우리들의 귀한 겨울 손님이 되어버렸다. 그 흔했던 손님들이 떠나고 없는 겨울하늘을 바라보면 서리 내린 바닷가에서 무엇인가에 골몰하던 점잖고, 그러나 겁이 많은 그 날짐승이 그리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