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입력 2014.01.21 11:29

<강경호 시인의 추억의 창-22>

(시인, 문학평론가)
아침 저녁이면 부엌에서 들리는 어머니의 도마질 소리가 즐거웠다. 먹을 것이 별로 없는 시절이었지만 어머니는 무엇을 써시는지 도마질을 하셨다. 어머니의 도마질 소리에 특별할 것도 없는 밥상이 차려지곤 하였지만, 그러나 그 소리는 허기진 아이들의 식욕을 일깨웠다.


어머니가 도마질을 하는 날은 깍두기나 채를 썰 때, 김치를 썰 때, 그리고 마늘을 쪼을 때, 어쩌다 생선을 썰 때, 그리고 특별한 날 낙지를 통통통 두드릴 때와 닭뼈나 생선뼈를 잘게잘게 썰 때 도마질을 하셨다.


농번기 때 모내기를 할 때나, 벼를 베는 날 어머니는 읍내 장에 가서 고등어를 사가지고 오셨다. 일꾼들에게 먹일 점심이나 저녁을 마련하기 위해 감자나 무를 썰고 고등어를 토막 내 고등어조림을 하셨다. 하루일이 끝나면 저녁밥은 집에서 밥을 먹곤 했는데, 그럴 때면 일꾼들은 새끼들을 데리고 와 밥을 먹였다. 이런 날은 무슨 대단한 잔치를 벌이는 양 아이들은 괜히 마음이 들뜨고 즐거웠다.


지금은 도마가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것들이 많다. 그러나 옛날에는 도마는 나무로 만든 것들뿐이었다. 큰 나무를 베면 가운데를 쪼개 대패로 다듬어 도마 아래에 판자를 대어 다리를 만들어 썼다.


나무로 만든 도마에 대장간에서 만든 무겁고 날카로운 식칼로 칼질을 하면 도마는 속이 패여 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도마가 더 이상 사용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를 때까지 배가 홀쭉해지도록 무쇠 칼은 여러 자루가 닳아 없어지는 것이다. 칼 맞는 일이 밥 먹는 일인 도마는 온몸에 칼을 맞아 상처투성이이다. 사람 같으면 수백 명이 쓰러질 일이지만 도마는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고 칼을 맞받아친다. 부드러운 나무가 날이 시퍼런 칼을 맞는 당당한 기개는 마치 국난 때 몸 사리지 않고 적과 싸웠던 것은 우리 선조들의 의로운 기품을 닮았다.


도마의 상처가 깊고 쓰라릴수록 우리들의 식탁엔 무럭무럭 김나는 더운 밥상이 차려지곤 하였다. 마치 압제의 폭력에 굴하지 않은 지사의 정신을 닮은 듯한 도마의 정신이 의롭게 느껴지곤 하였다. 어찌 보면 나뭇조각에 불과한 도마이지만 어린 날 고등어조림을 만들어주고 뜨거운 밥을 지어주던 도마는 내게 살아있는 정신이었던 것 같다.


도마를 내려치는 식칼이 무뎌질 때마다, 지쳐서 녹슬 때마다 아버지는 숫돌에 식칼을 갈아 날을 세웠다. 어머니의 도마질이 수월하라고 숫돌에 날을 갈아 주시던 아버지는 돌아가시는 날까지 우리 집의 무딘 칼을 갈아주곤 하셨다. 그러나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어머니의 도마질은 무디고 둔탁한 소리를 낸다. 한번은 지하철에서 칼을 가는 기계를 샀다. 그런데 그것에 칼을 가는데 뻑뻑 소리만 나고 오히려 칼날이 상해버렸다. 누군가 중국산이라서 칼이 잘 안 갈아지는 것이라고도 했지만 어쨌든 나는 아버지처럼 칼을 가는 재주가 없다.


우리 내외 출근하기 때문에 팔순이 넘은 어머니께서 도마질을 하며 집안 살림살이를 해주시니 참으로 죄송한 마음뿐이다. 어머니는 엊그제 아버지가 쓰시던 숫돌을 내놓으셨다. 오랜만에 마음을 먹고 숫돌에 칼을 갈았다. 나는 숫돌에 칼을 갈면서 칼을 갈던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렸다. 무딘칼을 쓰는 어머니께서 힘들어 하실까봐 숫돌에 물을 발라가면서 슥삭슥삭 칼을 가는 마음은 참으로 애틋한 것이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칼을 가는 마음은 숫돌이 자신의 몸을 버려가면서 칼날을 세우는 정신이 투사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즉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우리 가족이 더운밥을 먹게 하는 일은 나보다도 타자를 위하는 마음의 배려이기 때문이다. 아들이 숫돌에 갈아준 그 칼을 들고 어머니는 당신이 늘 쓰시던 다 헐은 나무 도마를 꺼내어 도마질을 하셨다. 여전히 옛날처럼 뜨거운 밥상을 차리는 도마질 소리가 오랫동안 내 마음의 귀를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