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입력 2014.01.21 11:14

<강경호 시인의 추억의 창-19>

강 경 호
(시인, 문학평론가)
오늘날에는 둠벙에서 물 푸는 소리를 들을 수 없다. 관계시설이 좋아지고 펌프가 잘 보급이 되어 쉽게 물을 끌어들일 수가 있기 때문이다. 가뭄이 심한 때는 저수지의 수문을 열면 농부들은 삽을 들고 논에 나가 수로를 얼쩡거리며 자신의 논에 물을 대려고 야단이었다. 서로 물을 대려다 들판에서 큰 싸움이 벌어지는 일은 흔한 일이었다.


그러나 저수지가 없는 산 밑의 천수답은 어쩔 수 없이 둠벙을 파고 며칠이고 밤새 물을 펐다. 내 유년의 부모님을 생각하면 밤늦게까지 둠벙에서 물을 푸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모습이 떠오른다. 바닷가에 있는 우리 논은 바닷물이 넘쳐 들어오는 경우가 많았다. 바닷물이 논에 들면 벼가 빨갛게 타버려 그 해 농사를 망치기 일쑤였다. 바닷물이 논에 들어오면 재빨리 바닷물을 빼고 논에 저수지의 물을 채워야 하는데 저수지의 수문은 언제나 열려있는 것이 아니였다. 저수지에 물을 채워놓았다가 꼭 필요한 시기에만 수문을 열었다. 그러다보니 아버지와 어머니는 가뭄 때나 논에 바닷물이 들어왔을 때면 어김없이 며칠씩 둠벙에 나가 두레질을 하셨다.


아버지는 바닷가 논 귀퉁이에 둠벙을 파셨다. 선산 아래 천수답 귀퉁이에도 둠벙을 파셨다. 늦가을 둠벙물을 품어내면 커다란 장어와 미꾸라지, 그리고 붕어가 잡혔다. 특히 가을 장어는 아주 기름진 것이어서 그 날은 고기를 먹는 날이었다. 숯불 위에 석쇠를 얹고 그 귀에 토막낸 장어를 올려놓으면 지글지글 소리를 내며 노릇노릇 익어갔다. 지금도 고향 들녘을 지나갈 때면 옛날 아버지가 농사를 지으셨던 논을 바라보고 그 논가의 둠벙자리를 바라본다. 그러나 둠벙은 사라져 보이지 않고 낯선 사람만 눈에 띈다.


1960년대, 부모님들께서는 밤늦게까지 돌아오지 않으셨다. 나는 어린 나이에도 부모님이 걱정이 되어 들에 나갔다. 부모님은 어두운 들에서 일하시느라고 늦으셨다. 그러나 어떤 때는 부모님이 보이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당산뫼 아래의 전답에서 부모님이 안 보일 때면 나는 바닷가 논으로 향했다. 그러면 그곳에서 부모님께서는 논을 매고 계셨다. 또 어떤 날은 아버지와 어머니께서는 둠벙가에 두레질을 하고 계셨다. ‘솨아 솨아’ 하면서 들리는 두레질 소리는 나를 아프게 하였다. 밤새 두레질을 하다보면 허리가 아프고 두레줄을 잡은 손에서 피가 났다. 처음에는 물집이 생기다가 두레줄을 잡을 수 없을 정도로 아픈 손바닥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상처난 손을 헝겊으로 칭칭 동여매고 두레질 하는 모습은 마치 밤새 도깨비가 춤을 추는 듯했다. 어린 우리들은 부모님이 두레질을 하는 그 시간 아무것도 모르고 잠에 떨어져 있곤 했으니 참으로 철딱서니 없는 자식들이었다. 그러나 밤새 허기진 논에 물을 대기 위해 두레질 소리는 어린 우리들을 키우는 생명의 소리였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나무로 만들어진 마름모 기둥의 사각 두레가 물 속으로 들어가 물을 담으면 배에 힘을 모아 두레를 들어 논으로 냅다 팽개치셨다. 그러면 두레에 담긴 물이 논바닥으로 흘러들어갔다.


다섯 마지기의 넓은 논에 물을 대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였을 것이다. 그러나 부모님들께서는 며칠씩 두레질을 해서라도 논에 물을 가두어 농사를 짓고 싶었을 것이다. 팍팍한 살림살이 때문에 식구들을 먹여 살리기 힘들었던 그 시절, 우리들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어깨는 새끼들이 매달려 있었기 때문에 두레질을 마다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오신 아버지와 어머니의 어깨는 수만 번 품어낸 두레질 때문에 알이 배이고 신경통이 도져 말할 수 없는 통증이 몰려왔을 것이다.


두레질 소리가 아름답거나 음악적으로 들리지는 않았지만 식량을 얻기 위해 뼛골이 빠지는 부모님들의 수고가 배어있었다. ‘솨아~ 솨아~’ 논에 물 떨어지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가슴이 철렁 하는 아픔이 묻어났다. 한밤중까지 두레질 하는 소리가 우리들을 키웠다는 것을 생각하면 두레질 소리만큼 고맙고 애틋한 소리도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