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입력 2014.01.21 11:07

<강경호 시인의 추억의 창-16>

강 경 호
(시인, 문학평론가)
나는 입시를 통해 중학교에 진학한 마지막 세대이다. 시험에 합격한 후 나는 검은색 교복과 백선이 둘러지고 가운데에 학교 모포가 박힌 모자를 아랫목 바람벽 못에 걸어 두었다. 중학교에 빨리 가고 싶어 검은 교복과 모자를 써보곤 하였다.


그러나 정작 나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것은 함평서국민학교를 다니던 어린 아이가 더 넓은 세계인 함평읍내로 진출하는 일이었다. 그동안 나는 집과 초등학교를 왔다갔다 하면서 다람쥐 쳇바퀴 돌듯한 우물 안의 개구리와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마을 앞바다 함평만을 바라보며 길을 떠나는 배를 보며 미지의 세계를 동경했다. 마을 뒷산에 올라 까마득하게 먼 흰구름 아래에는 어떤 세상이 있는지 무척이나 궁금했다.


드디어 중학생이 되었다. 새로운 세계는 눈부셨다. 읍내에는 2~3층 건물들이 서 있었다. 가게에는 상품들이 넘치고 빵빵 거리며 질주하는 자동차와 버스가 분주히 오고 갔다.


읍내장은 만물상이어서 없는 물건이 없었다. 그런데 나는 30리가 넘는 거리를 걸어다녀야 했다. 우리 마을에는 버스가 들어오지 않았다. 새벽밥을 먹고 읍내까지 걸어가면 아침부터 힘을 모두 빼버렸다. 학교가 끝나면 집으로 돌아오는 시간이 2시간, 때로는 2시간 30분씩 걸렸다. 그때는 오늘날처럼 길이 쭈욱 뻗어있는 것이 아니라 사행천처럼 이리저리 휘어졌기 때문에 더 멀기도 했지만 이제 열세 살 난 어린 나는 해찰을 많이 하였다. 길을 가다가 꽃을 꺾어 향기를 맡아보기도 하고 풀섶에서 뛰어가는 개구를 잡기도 하였다. 하루에 4~5시간을 걷다보면 발뒤꿈치가 아팠다. 저녁 무렵에 집에 돌아오면 파김치가 되어 공부를 할려 해도 저녁을 먹고 나면 잠이 쏟아져 공부를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함평읍내 함평리에서 자취를 하기로 하였다. 사촌은 중학교 입시에 떨어졌었다. 그런데 어떻게 다시 학교에 다니게 되었는지는 몰라도 같이 중학교에 다녔다. 나는 사촌과 함께 자취를 하였는데, 실상은 할머니가 밥을 해 주셨다. 집안의 종손인 나를 무척이나 어여뻐 해 주시던 할머니가 읍내까지 오셔서 밥을 해 먹이고 도시락을 싸 주고, 빨래를 해 주셨다.


내가 중학교에 입학한 지 두서너 달이 되던 날, 아침에 쌀을 씻던 할머니가 갑자기 쌀바가지를 든 채 쓰러지셨다. 중풍으로 쓰러진 할머니는 내가 졸업장을 타기도 전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내 유년의 기억 속에 오롯하게 떠오르는 사람은 할머니이다. 내가 장성하여 첫 시집을 출간할 때까지도 나의 시적 상상력은 할머니 뿐이었다. 당신의 영감님이 그리워 어린 나를 데리고 큰 재를 넘어올 때 할머니는 눈물을 훔치고 소리없이 우셨다. 그때 어린 내 귓가에 들려오던 산비둘기와 뻐꾸기 소리가 왜 그리 슬펐는지,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산비둘기와 뻐꾸기 울음소리가 들리면 할머니가 다시 살아온 듯한 생각이 든다.


할머니가 쓰러질 무렵, 같은 반 친구가 향교 다리에서 차에 치여 죽었다. 중학교에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그 무렵, 친구의 부모님은 자식에게 큰 기대를 가지고 있었을텐데 아들이 차에 치여 죽고 말았으니 얼마나 가슴이 아팠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곤 한다. 그 친구는 대동면 어디께에서 자전거를 타고 통학을 하였다. 그 친구가 죽은 날 그의 어머니는 함평경찰서 앞에서 밤새 “내 아들 살려내라!”고 소리치며 통곡을 하였다. 그것을 지켜보던 나는 몹시 가슴이 아렸다.


나는 중학시절 내내 거의 걸어다녔다. 많은 사람들이 10리를 걸어다녔다는 둥 시오리를 걸어다녔다는 둥 걸어다닌 것이 무슨 벼슬인 양 무용담처럼 이야기를 하지만, 초등학교 때부터 나처럼 먼 길을 걸어다닌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나는 지금도 걸어다니는 것이 좋다. 요즘 아이들은 자가용으로 데려다 주고 데려오기 때문에 걷는 데는 익숙하지 않는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중학교 때 목포까지 걸어간 적이 있을 정도로 걷는 것이 즐겁다.


겨울철에는 해가 짧아 새벽에 일어나도 한밤중처럼 어둡다. 추운 바람을 맞으며 읍내로 향하다 보면 다른 마을 아이들을 만나 더 큰 무리를 이루어 학교로 향한다. 양림을 지나서 고양촌을 지나면 곧이어 작곡재가 나타난다. 작곡재는 읍내에 이르는 제법 가파르고 큰 고개이다. 오늘날 아스팔트로 포장된 도로를 보니 왜소하기 짝이 없는 고개이지만 그 옛날에는 큰 고개로 보였다. 작곡재쯤에 이르면 여러 마을에서 도착한 아이들이 마치 바다에 이른 강물들이 넓은 세상에 이른 것처럼 하나의 거대한 강물을 이루었다. 검은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작곡재에 오르는 모습이 검은 개미떼처럼 느껴졌다. 오늘날에는 농촌에 아이들이 급감하여 구경하기가 힘들 정도로 귀해졌지만 당시에는 아이들이 많았다.


읍내에서 중학교에 다닐 때 그때는 알 수 없었던 삭막함이 나를 엄습했다. 천의무봉(天衣無縫)으로 전혀 문명세계에서 때묻지 않은 내가 만난 읍내의 높은 건물과 많은 자동차, 그리고 수많은 인파들이 나에게 큰 충격을 준 것이다. 이른바 문화적 충격이랄 수 있는데, 나는 문명에 쉽게 적응하지 못했다. 그 충격은 이후로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나를 문명에 저항하는 사람으로 만들고 말았다. 훗날 루소가 “자연으로 돌아가”고 말한 것에 크게 공감을 하고 생태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오늘날 인간의 욕망은 과학문명을 발전시켰다. 자연을 물질적 가치로 인식하여 자연과 인간의 불화를 가져왔다. 중학교시절, 나는 확실하게 규명할 수는 없었지만, 인간의 과도한 욕망인 문명에 대해 시골에서 겨우 읍내로 진출하였는데 일찌감치 문명에 대한 알레르기 반응을 보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