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입력 2014.01.21 11:05

<강경호 시인의 추억의 창-15>

(시인, 문학평론가)
  학창시절의 수학여행은 즐겁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을 충족시켜주기에 알맞기 때문이다. 중학교 때는 학교에서 수학여행을 실시하지 않아 가지 못했고, 고등학교 시절엔 부여로 갔다. 초등학교 때와 고등학교 때 수학여행을 하였지만, 수십 년이 지난 오늘에도 어찌된 일인지 초등학교 시절의 수학여행이 내 마음 속에 오롯이 남아 있다.

초등학교 때 수학여행을 가기 전까지 내가 가장 멀리 가본 곳은 손불면 소재지였다. 그리고 만날 다니는 함평서국민학교가 내가 세상에 태어나서 가장 멀리 가본 곳이었다. 함평읍내조차 구경 한 번 해본 적이 없는 그야말로 촌놈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내장산과 백양사, 그리고 광주를 다녀오는 초등학교 때의 수학여행은 나를 며칠 전부터 잠 못 들게 하였다. 우리집에서 나선 길이 학교를 지나 읍내를 거쳐 어디로 가는지가 궁금했던 초등학교 6학년생인 열두 살짜리는 낯선 마을과 낯선 사람, 낯선 세계를 그리워하고 동경해 왔다. 모든 세계가 궁금했다.

1969년 가을, 은행알이 여물었을 때이니 아마 10월쯤이었을 것이다. 학교에서 버스를 타고 내장산으로 향했다. 들판은 황금색으로 변해 있고, 실바람은 까까머리 소년의 얼굴을 기분좋게 간지럽혔다. 나는 약간 멀미했지만 들뜬 마음에 크게 문제되지 않았다. 어떤 경로로 내장산에 도착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장산에 도착하니, 그 시절에도 많은 사람들이 단풍구경을 왔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형형색색으로 물감을 칠한 듯한 울긋불긋한 산을 바라보며 조물주의 능력에 감탄했다. ‘산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도 있구나’를 생각했다.

내장산에서 백양사로 넘어올 때는 험한 고갯길만 생각난다.

장성 백양사 마을 우리가 머문 숙소에 있는 감나무에 붉은 감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것이 마치 불을 켠 등을 달아놓은 듯 환했다. 우리 동네엔 감나무가 드물어 감나무가 있는 집이 부러웠었는데 ‘감나무가 있는 집은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잊혀지지 않는 사건은 백양사 은행나무 아래에서 벌어졌다. 모두들 석굴 속에 있는 암자에 올라갔는데 나와 사촌, 그리고 몇몇 친구들은 석굴에 가지 않고 백양사의 커다란 은행나무 아래에서 은행알을 주웠다. 수백 년 묵은 커다란 은행나무 아래에는 많은 은행알이 떨어져 있었는데 우리는 변냄새 나는 은행알을 손으로 주웠다. 더 많이 주을 욕심으로 은행의 말랑말랑한 과육을 손으로 쥐어짰다. 그때까지 나와 사촌은 은행알을 만지면 옻을 탄다는 것을 까맣게 몰랐다. 특히 사촌은 욕심이 많아 은행알을 떡주무르듯이 손으로 만졌다. 나는 내가 주은 은행알을 사촌에게 모두 줘버렸다. 이상한 냄새가 나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깨끗하게 손을 씻었다.

우리가 은행알을 줍는 사이 다른 아이들은 다음 행선지인 광주로 떠나버렸다. 선생님께 꾸중을 들은 우리는 시외버스를 타고 광주로 향했다. 버스는 만원이어서 우리는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숨이 막혔다. 나는 비위가 약해 멀미를 하여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런데 버스의 승객들이 붐비다보니 버스 안은 열기로 가득했다. 그러다보니 은행알을 싼 보자기를 꼭 안고 있던 사촌은 몸이 근질근질 가렵기 시작하였다. 흔들리는 버스에서 자리에 앉지도 못하고 이리저리 휩쓸려 다니는데 사촌의 얼굴이 붓기 시작하였다. 나중에는 아예 얼굴을 몰라볼 정도로 탱탱 부어버렸다. 사촌은 온몸이 가렵다고 야단이다. 그런데 다행스럽게 나는 가렵지 않았다. 은행알을 품에 안은 사촌이 옻을 탔던 것이다.

버스가 광주역 부근에서 하차를 했던 것 같다. 그 무렵 광주은 막 개통 되었지만 아직 공사중이었다.

우리는 광주공설운동장(현 무등경기장)까지 걸어갔다. 공설운동장은 본부석 부근만 스탠드가 있었다. 공설운동장 구석에 임시동물원이 있었던 것 같다. 거기에서 커다란 코끼리를 처음 보았다. ‘이 세상에 저렇게 큰 짐승이 있다니 놀랍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리고 사람과 비슷하게 생긴 원숭이도 처음 보았다. 훗날 사직공원에 동물원이 생겨 짐승들을 실컷 보게 되지만 당시에 내가 본 동물들은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와 같은 것이었다.

그날 저녁 우리는 2박3일의 수학여행을 마치고 광주에서 영산포를 거쳐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우리가 탄 버스의 라이트가 고장이 나 불을 켜지 않은 상태에서 운행을 하다보니, 어린 마음에도 무척 불안했던 기억이 난다.

오늘 우리 아이들은 좋은 세상을 만나 어린시절부터 우리나라는 물론 남의 나라를 쉽게 다녀오기도 한다. 생활이 넉넉해지고 지구촌이 이웃처럼 가까워졌기 때문이다. 44년 전, 내가 다녀온 세계는 고작 내장산 일우와 광주공설운동장이지만 내 설레임의 미지였고, 내 상상력의 원천이 되었다. 오늘날에 비하면 하찮은 여행이지만 세계에 대한 그리움을 품게 해 준 아름다운 여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