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입력 2014.01.21 11:00

<강경호 시인의 추억의 창-13>

강 경 호
(시인, 문학평론가)
우리는 늘 어머니의 희생적인 사랑에 대해 말해왔다. 그러다보니 아버지께 죄송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묵묵히 아무말 없이 자식과 가족을 위해 깊은 사랑을 실천하신 아버지 손을 뜨겁게 잡아드린 적이 없어 마음이 아프다.


아버지는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식민지 청년으로 만주 봉천(오늘날의 심양) 벽돌공장에서 붉은 벽돌을 찍으셨다. 그리고 해방되기 1여년 동안 태평양전쟁에 참여하기 위해 일본군사훈련을 받으셨다. 6·25전쟁 중에는 설날을 하루 앞에 두고 전쟁에 참여하여 생사의 고비를 수없이 넘나들며 싸우기도 하셨다. 전쟁이 끝난 폐허의 땅에서 끼니를 걸러가며 새끼들을 길러냈다. 이는 우리 아버지 뿐만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았던 우리 아버지들이 맞은 운명이었다.


그렇지만 우리 아버지는 불모의 땅 열 다섯 배미를 한 배미로 만드셨다. 그리고 씨앗을 뿌리고 아예 그곳에서 사셨다. 포기할 줄 모르는 아버지의 근성은 곡식을 키워내어 허기전 새끼들의 목구멍에 더운 밥을 떠 먹여주는 세상 사는 재미로 여기셨다.

 
나는 지금 생각해도 우리 아버지처럼 억척스러운 사람을 보지 못했다. 아무것도 없는 집안을 일으키기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을 하셨다. 산을 개간하여 그곳에 밭을 일구는 세월 속에 곡괭이 두 자루가 다 닳아져 반토막이 되어 쓸모없게 되었다. 아버지의 몸이 쇠붙이라면 벌써 손과 발이 반토막이 되었을 것이다. 사람을 사서 함께 일을 하면 조금 수월할 일도 언제나 아버지는 혼자 일하셨다. 그러다보니 밤늦게 집에 들어오시면 끙끙 앓으셨다. 그러면 어린 나는 아버지의 등을 밟아드리면 “아이고, 시원타!” 하시곤 하셨다.


늦게 본 아들을 빨리 학교에 보내고 싶어 나를 일곱 살에 학교에 입학시키셨다. 당시에는 나보다 두세 살 더 먹은 아이들이 부지기수였다. 예쁜 도시락과 당시에는 구경하기도 힘든 운동화와 가방을 사주셨다. 내가 공부를 잘 할 수 있다면 무슨 일이라도 할 태세였다. 나는 그런 아버지의 기대를 져버리지 않기 위해 책을 열심히 읽었다. 아버지는 내가 공부를 열심히 한 줄 아셨다.


내가 중학교를 읍내에서 다닐 때 아버지는 날마다 마중 나오셨다. 그때는 우리 동네에 버스가 다니지 않을 때여서 들길을 걸어 저수지를 지나 산을 넘고 다시 저수지를 지나 버스를 타고 등교하기 위해 새벽밥을 먹어야 했다. 하교시에도 버스를 타고 산 넘어 마을 저수지 앞에서 내려 한참을 걸어 집에 걸어가야 했는데, 늦가을이나 겨울에는 밤중이 되어 버스에서 내리곤 했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어린 아들을 마중 나와서 내가 버스에서 내리기를 기다리고 계셨다. 학교 수업이 끝나면 읍내 정류장에 가서 손불행 버스를 기다렸다. 버스는 하교시간에 맞춰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만은 아니었다. 어떨 때는 한 시간 이상씩 버스를 기다릴 때도 있었다. 또 어떤 때는 버스가 빼먹을 때도 있었다. 당시에는 휴대전화가 없던 시절이라 아버지는 마냥 나를 걱정하며 산구릉 길에서 나를 기다리고 계셨다.


아버지는 날마다 아들이 걱정되어 밤길을 걸어와 오리나무숲 우거진 컴컴한 산길에서 기다리시곤 했는데, 나는 버스에서 내려 저수지 둑을 지나 300~400m를 걸어 산구릉 길에서 아버지는 나의 발자국 소리에 귀를 기울였을 것이다. 그러면서 아버지께서도 아무도 다니지 않는 산길이 무서워 담배를 피우셨다. 그런 아버지의 손에는 커다란 몽둥이가 꼭 쥐어져 있었다. 그 몽둥이는 아들을 지키는 수호신이었으며 아버지 자신의 무섬증을 격파하는 방어기제이기도 하였을 것이다. 당시에 나는 우리 아버지가 이 세상에서 제일 용감하고 든든한 분이라고 생각했었지만 오늘 내가 우리 아들 딸들의 등하교길을 마중나가면서, 그 옛날 우리 아버지께서도 어둠을 무서워하는 연약한 사람이었음을 깨닫는다.


밤늦게 버스에서 내려 산길에 접어들면 저만치 어둠 속에서 불이 깜박거렸다. 나는 그 불빛이 아버지가 피우시는 담뱃불이라는 것을 뻔히 다 알고 있었지만 두려웠다. 불빛에 가까이 갈수록 내 목은 뻣뻣해졌다. 아버지도 앞에서 다가오는 존재에 대해 두려웠다고 고백하신 적이 있다. 어둠 속에서 “아들아!” 하고 약간 떨리는 듯한 아버지의 자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버지와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산고갯길을 건넜다. 워낙 과묵한 분이라서 아버지는 아무 말씀하지 않고 집으로 돌아오곤 하였다.


생각해보면 아버지의 침묵 속에 자식을 사랑하시는 뜨거운 마음이 용광로처럼 들끓고 있었던 것을 나는 수십 년이 지난 후에야 알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아버지께 “이버지, 고맙습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라는 말을 드린 적이 없다. 학교길의 아들은 걱정하는 아버지의 마음으로 손에 몽둥이를 쥐고 마중하시던 아버지의 뜨겁고, 서늘한 그늘이 있어 나를 세상의 겨울 찬바람을 막아주고 여름날의 무더위를 가려주는 아버지의 그늘은 참으로 커다란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