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입력 2014.01.21 10:54

<강경호 시인의 추억의 창-10>

강 경 호
(시인, 문학평론가)
지금 생각하면 우습지만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는 아무렇지도 않게 당연한 것들이 있었다. 특히 60년대에는 무장간첩이 출몰하여 사람을 살상하는 일이 많아서 반공이념을 강화시키고 있었다. 그래서 공공장소의 벽은 물론 전봇대에 각종 표어가 붙어있었다. “때려잡자 김일성! 이룩하자 남북통일!”, “인간백정 김일성을 찢어 죽이자!”, “이웃집에 오신 손님 수상한가 살펴보자!” 등 수많은 표어로 국민들을 반공이념으로 교육을 시켰다.


우리나라는 예부터 ‘동방예의지국’으로 불리던 선비의 나라였다. 그런데 이웃집에 오신 손님이 수상한지 수상하지 않는지 살펴보라고 했으니 너무했던 것 같다. 간첩을 색출하는 일이야 국민으로서 당연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표어에까지 무지막지한 표현을 했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뿐만 아니라 김일성이 아무리 나쁜 사람이라고 해도 찢어 죽이자는 표현은 동방예의지국 사람들의 입에서 나올 말이 아니었던 것 같다.
당시에는 우리나라는 철저하게 ‘반공’을 국시로 삼고 있었다. 6·25전쟁을 통해 공산주의의 잔인성과 북한의 야욕을 확인하였던 터라 ‘빨갱이’라면 치를 떨고 있었다. 마을에서도 아무개네 집 누구누구가 6·25때 총에 맞아죽고 죽창에 찔려 죽었다는 이야기를 어른들을 통해 들을 수 있었다.


그런 시절에 우리나라 곳곳에 무장공비들이 출현하여 갖은 만행을 자행하고 있었다. 울진·삼척 무장공비 출현사건과 강원도 평창에서는 이승복 어린이 일가족이 무장공비에 의해 살해되었다. 심지어는 김신조 일당이 청와대를 습격하려고까지 하였다.


이런 분위기 속에 해안선에는 전투경찰이 배치되기도 하고 군인들이 주둔하기도 하였다. 함평 읍내가 가까운 곳 옥산리에 대대병력이 주둔하기도 하고 우리 석창리에는 중대규모의 군인들이 주둔해 있었다.


그러자 동네에는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하였다. 밤마다 동네 처녀들이 해안초소에 놀러다닌다는 것이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동네 누님뻘 되는 처녀들이 해안에서 경계근무를 하는 전투경찰들과 연애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몇몇은 나중에 전투경찰에게 시집가기도 했던 것이다. 전투경찰이 해안초소에서 철수한 훗날 해안에 남아있던 개인호나 초소는 어린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었다.


군부대도 언젠가 모두 철수해 버렸다. 지금도 군인들이 주둔했던 흔적들이 남아있어 반공이념의 정서가 흑백필름처럼 떠오르고 그 아득한 시절의 추억도 함께 떠오른다.


초등학교 6학년 때인 1969년에 나는 중학교 입시를 준비하느라 학교에서 밤늦게까지 공부를 하다가 집에 돌아갈 때였다. 동네로 들어가는 길목에 군대가 있었는데 반드시 그곳을 거쳐야 동네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런데 그곳에 초병이 경계근무를 서고 있었다. 어린 우리들이 그곳을 지나가려고 하는데 군인들이 불쑥 총을 내밀며 “손들어!”를 하는 것이었다. 당시 소문에 의하면 어느 해안 마을에서는 마을 사람들이 바닷가 백사장을 거닐다가 무장공비로 오인받아 총에 맞아 죽었다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우리들에게 총을 겨누고 “손들어!” 하고 군인이 소리치자 벌벌 떨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당시 주포 부둣가에선가 함평만을 통해 침투할지도 모르는 무장공비나 간첩선을 감시하기 위해 커다란 헤드라이트를 밤바다에 비추곤 하였다. 그런데 실제로 우리 마을에 무장공비가 나타났다.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이니까 1970년대의 일이다. 학교에 갔다가 돌아오는데 예비군들이 총을 들고 산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마을에서는 확성기를 통해 우리 동네 뒷산에 간첩이 나타났으니 저녁에 문단속을 잘 하라고 방송을 하고 있었다. 나는 무서운 생각이 들어 밤에 그야말로 문고리를 걸고 잤다. 다음 날 학교에 갔다 오니 이번에는 군인들이 산을 에워싸고 있고, 또 한 떼의 군인들은 어디론가로 이동하고 있었다. 하늘에는 헬리콥터가 삐라를 뿌리며 방송하고 있었는데, “너는 지금 포위되어 있다. 그러니 자수하라. 자수하면 잘 살게 해 주겠다.”는 내용이었다. 훗날 들은 이야기로는 한 명은 마을 뒷산에서 사살되고 또 한 명은 포위망을 뚫고 도망갔다가 전라북도 어디께에선가 사살되었다고 한다.


간첩을 신고한 사람은 우리 마을의 내 친구들이었다. 이들은 나와 동갑내기들이지만 모두 나보다 한 해 늦게 학교에 들어갔는데 한 아이는 초등학교만 졸업했고, 다른 아이는 중학교만 졸업해서 집에서 농삿일을 거들고 있었다. 이들이 소를 먹이기 위해 산에 갔다가 소를 매어놓고 꼴을 베다가 간첩을 발견했는데 참으로 어처구니 없이 간첩을 신고하게 되었다.


한 친구가 꼴을 베다가 산을 둘러보는데 한 곳에 풀이 수북하게 쌓여있어 낫으로 풀을 찍었는데, 풀 아래에 구덩이가 파져 있고 그 속에서 무장공비 둘이 더운 날씨 탓인지 웃통을 벗고 있었다. 한 친구와 무장공비가 서로 눈을 마주쳤다. 불꽃이라도 튈 것 같은 순간, 친구는 무조건 뛰었다. 다른 친구도 상황을 파악하고 뛰었다. 한 친구는 손불지서로 향하고 다른 친구는 주포 쪽으로 달렸다. 신발이 벗겨졌는데도 모르고 발에서 피가 나도록 달렸다. 무장공비도 다급했다. 처음에는 이들을 쫓으려 했겠지만 아마 포기하고 다른 곳으로 도망을 갔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공비의 출현이 알려져 예비군과 군인들이 작전을 하게 된 것이다.


간첩을 신고한 중학교를 나온 친구는 전투경찰이 되었는데, 공비를 신고한 덕분이었다. 두 친구 모두 보상을 받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