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입력 2014.01.21 10:49

<강경호 시인의 추억의 창-8>

강 경 호
(시인, 문학평론가)
88서울올림픽의 개막식을 연 상징적인 풍경은 어린아이가 굴렁쇠를 굴리며 올림픽 경기장에 들어오는 모습이다. 때묻지 않은 어린아이의 동심으로 올림픽을 치루겠다는 우리 민족의 다짐을 보여주면서 세계인에게 스포츠정신이 무엇인지를 상기시키는 메시지였다.


그런데 나는 그 장면을 보면서 수십 년 전의 까까머리 소년을 떠올렸다. 초등학교 시절 학교에서 내 또래의 어린아이가 굴렁쇠를 굴리고 다녔다. 나는 그것이 무척이나 부러웠다. 굴렁쇠를 가지고 싶었다. 그 어린아이는 학급에서도 공부를 잘했다. 단정하게 깎은 머리, 두 눈은 총기가 있어 총명해 보이는 그 아이의 이름은 ‘영수’이다. 나와 그 아이는 같은 반이었는데 수십 년이 지난 최근에 얼굴을 보았다. 목포에서 유통회사를 운영한다고 하였다. 그 친구를 보자 나는 조금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옛일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영수가 굴리고 다니는 굴렁쇠가 갖고 싶었던 나는 학교가 끝나고 화장실 부근 어디께에 굴렁쇠를 놔두는 것을 보았다. 나는 아무도 없는 학교에 남아 있다가 굴렁쇠를 몰래 훔쳤다. 그때 가슴이 방망이질 했다. 생전 처음 도둑질을 하였다. 굴렁쇠를 집으로 가져올 때 함평서초등학교 유리창을 바라보니 석양에 지는 해의 빛을 받아 벌겋게 타고 있었다.


그 뒤에 내가 굴렁쇠를 가지고 놀았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아마 나는 굴렁쇠를 굴리며 동네 골목을 구석구석 누볐을 것이다. 어디로 가야할 지 모르는 내 생의 길을 굴렁쇠를 조종하며 씽씽 달렸을 것이다. 때로는 언덕을 오르며 위태위태한 길을 몰고 내 유년의 길을 헤치며 나아갔을 것이다.


이렇듯 나의 생을 찾아가는 길에서 오늘의 나를 있게 한 이정표는 내가 4학년 1반이 되었다는 것이다. 당시에는 학교에 도서관이 없었다. 그래서 학교에서 4학년 1반 교실 뒤에 간이 도서관을 만들었다. 수많은 책들이 서재에 꽂혀있어서 나는 원없이 책을 읽게 되었다. 쉬는 시간은 물론 수업시간에도 책을 읽었다. 어린이들이 읽는 잡지도 제법 있었던 것 같다. 지금도 생각나는 잡지는 《어린이자유》라는 잡지이다. 냉전시대의 이념이 덧칠된 잡지였지만 내가 훗날 시인이 되고 문학평론가가 되는데 자양분이 된 것은 사실이다. 당시에 도서실에 있던 모든 책들을 읽어버린 나의 허기는 지금까지 지칠줄 모르고 책을 읽어치우게 한다.


초등학교 때 소풍지는 주로 돌머리로 갔다. 자주 그곳으로 소풍을 갔는데 중학교에 들어가서도 돌머리는 소풍지의 단골코스였다. 함평만을 바라보고 있는 돌머리(石頭)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기암괴석이 널부러진 곳이다. 바위틈에서 석화를 따기도 하고 갯벌에서 게와 고둥을 줍기도 하였다. 소풍날 가장 즐거운 것은 도시락 먹는 일이었다. 일년 중 가장 특별한 날이기 때문이다. 이 날은 우리가 주인공이어서 도시락에 계란말이와 단무지가 전부이지만 평소에는 자주 못 먹던 음식이었다.


바닷가 주변에는 소나무와 잡목들이 우거져 있었다. 이곳에서 보물찾기놀이는 아이들이 소풍에서 가장 기대하는 즐거움이었다. 소나무 숲 속 어딘가에 선생님이 숨겨놓은 보물딱지를 찾아 펴보면 상품의 이름이 적혀 있는데 내 기억으로 나는 단 한 번도 보물딱지를 찾은 적이 없다. 다른 아이들은 두 장씩 보물딱지를 찾아 공책이나 연필 등 학용품을 탔다. 그 아이들을 바라보며 부러워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돌머리 바닷가가 주된 소풍지이기는 하지만 때로는 학교 뒷산인 당마산에 소풍을 간 적도 있다. 교가에서도 나오는 이 산엔 신석기 시대의 유물이 출토된 곳이기도 하다. 학교 뒷산에 올라 도시락을 까먹고 내려오는 소풍이지만 소풍은 유년의 즐거운 추억이 깃든 것이었다.


유년의 학교생활을 생각할 때 떠오르는 것 중의 하나는 학교 가는 일이었다. 아침에 우리 마을 아이들이 모여서 줄을 지어 십 리 길을 걸어갔다. 마을마다 책임을 맡은 부락장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부락장은 주로 6학년 형이 맡았다. 부락장이 인솔하에 학교까지 대열을 흩트리지 않고 갔었는데 그때는 그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였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때는 초등학교가 아니라 국민학교라고 불렀는데 아이들도 국민으로 인식하는 것은 좋지만 국민들을 통제하여 교육하고자 하는 일제나 군사문화의 잔재가 아닌가 싶다. 이렇듯 나는 점차 대한민국 국민이 되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