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입력 2009.11.01 14:59

- 전남 최초, 건설공사의 기계화 추진
- 4개 자회사와 함께 건설공사 중추 역할
- 경영신용상태 평가서 “A등급” 받아

일신종합건설(주) 회사 전경
1960년대 한국경제는 경공업 중심의 수출주도형 공업화 정책을 실시했다. 그 결과 산업구조는 1차산업에서 2차산업으로 옮겨졌다.

1970년대 들어 중화학 공업 육성, 새마을 운동 전개, 수출주도형 성장정책 지속으로 이른바 ‘한강의 기적’이라는 찬사를 받게 된다.

경제성장과 더불어 건설붐이 일어났다. 1970년대 급속한 경제성장 현장 속에 (주)일신중기(대표이사 이재관)는 한복판에 서게 된다. 1976년 5월 광주광역시 서석동에 일신중기는 설립되었다. 일본에서 수입한 건설기계를 건설현장에 투입했다. 전남지역 최초로 건설현장에 중장비를 도입한 것이다. 이는 건설공사의 기계화 추진, 건설공사의 효율성을 극대화 시키는 결과를 낳게 되며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된다.

현재 공사중인 조감도
일신은 설립 2개월 만에 토목공사업과 철근콘크리트공사업을 취득했다. 또 설립 13년 만에 전문건설업 일신중기는 일반건설업 일신종합건설(주)로 변경, 본점을 함평군 해보면으로 이전했다. 1982년 당시 자본금 1억4천만의 일신은 1990년 자본금 30억원으로 불과 8년만에 30배 이상 증자되었다.

이처럼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는데는 끊임없는 기술개발이 원동력이다. 2000년 1억2천만원의 기술개발투자비는 지난해는 6억1천만원이다. 2000년부터 매년 기술개발비를 투자하여 기술개량과 신공법개발 등 건설업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노력을 계속해 오고 있다.

개발된 신기술 및 특허공법을 공사현장에 활용, 경비절감과 건설공사의 품질을 향상 시키고자 하는 일신의 노력은 계속된다.

한편, 조선이공대학과 우수기술인력양성과 상호발전을 위한 산학협동을 체결은 낙후된 전남지역의 고용창출효과와 경제활성화에 기여하고 있다.

공사현장에서 안전관리는 절대 요건. 무재해 달성을 위해 철저한 안전관리 대책으로 지난해에는 업게평균 재해율보다 낮은 0.46을 기록했다.

일신이 받은 각종 표창장 및 공로패
우수시공 및 성실시공은 그대로 인정받았다. 제주지방해운항만청, 대전광역시, 목포시, 철도청 등으로부터 그 능력을 인정받아 표창장 및 공포패를 수상했다.

도급실적은 회사의 건실성을 그대로 말해준다. 1998년 대전광영시 봉명지구 토지구획정리사업 기반시설공사 공사비 1백1십3억원, 2001년 국립 남도국악원 건립공사 1백5십8억원, 광양시관내 국도대체우회도로 건설공사 5백8십2억원, 2002년 상암3공구 5단지 아파트건설공사 2백7십7억원, 2008년 근로복지공단 연수원 신축건축공사 1백9십3억원, 금년도 전남지방경찰청사 신축공사 1백6십4억원 등이 있다.

이는 신용평가등급에서 여실히 나타났다. 금년도 한국기업데이터(주)에서 실시한 평가에서 기업신용평가등급 ‘A’를 받는 쾌거를 올렸다. 또 대한건설협회에 따르면 경영상태 확인에서 차입금의존도 0%, 유동비율 210%를 기록, 내실이 튼튼함을 그대로 입증해 주고 있다.

일신은 원․하도급간 공정한 거래를 원칙으로 하도급 계열화 등록을 실시하고 있다. 모든 하도급공사비에 대하여 어음결재 0%, 전액 현금 지급하여 사회적 역할을 다하고 있다.

현재 전남지방경찰청사와 근로복지공단 연수원, 지세포, 화순~한천간 도로공사 등 굵직한 공사를 진행하고 있는 일신은 중산건설, 신실건설, 서해건설, 중산중기 등 자회사를 두고 있다.

완벽한 신용등급, 견실한 재무관리를 발판으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일신종합건설(주). 대형 건설업체로 성장하기 위한 ‘제2의 도약’을 위한 힘찬 출발은 이미 시작되었다.

이재관 회장 인터뷰

이재관(85․광주광역시 서석동) 재광함평군향우회 고문. 교사와 경찰관으로 공직생활을 하다 돌연 사업을 하고 싶다는 욕망 하나로 공직자의 길을 접고 사업가로 변신, 오늘에 일신종합건설(주)을 이룩했다. 대한중기협회 부회장, 대한체육회 전남 체조협회장, 대한전문건설협회 전남 지부장, 대한건설협회 전라남도회 부회장, 함평군엑스포 추진위원 등 다양한 사회활동을 하고 있다. 무엇보다 후학 양성의 깊은 뜻을 두고 있는 이재관 고문의 애향심은 끝이 없어 보인다. (편집자 주)

- 공직생활을 접고 사업에 발을 딛게 된 동기는

= 해보면 문장에서 태어났다. 독학으로 공부하고 해보초등학교에서 첫 교편을 잡았다. 이후 전남도경에서 근무했다. 안정된 직장이였으나 내 적성에는 맞지 않았다. 오히려 사업쪽에만 관심을 갖게 되고, ‘이것이 내가 할 일이다’고 생각했다.

-1989년 본점을 함평 해보로 이전하게 된 이유는

= 공직생활을 접고 사업을 시작한 게 1960년 이였다. 일본에서 쓰다 남은 장비를 수입해서 수리하고 사용했다. 이후 1976년에 광주 서석동에 일신중기(주)를 설립했다. 그러다 1989년에 본점을 고향 해보로 이전했다. 고향 세수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고자 했다. 얼마나 도움이 되겠냐마는 그래도 돕고 싶었다. 사실 본점을 옮긴 뒤로 불편한 점이 많았다. 세무관계, 법원 업무 등 가까운 광주를 두고 나주와 목포로 다녀야 한다. 그럼에도 고향에 도울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돕고 싶었다.

- 향우회 활동은

= 30년 전, 고향 불우 청소년들에게 작은 도움을 주던 차에 향우회 조직을 생각했다. 고인이 되신 윤중열님과 의논 끝에 구성하게 됐다. 제3대 회장을 시작으로 3회 연임을 했다. 지금은 고문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재광함평군향우회 장학회 이사장직을 맡고 있다. 본 장학회를 법인으로 조직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내년 6월쯤이면 가능하리라 생각한다.

- 앞으로 계획은

= 서석초등학교, 충장중학교, 동신중학교에서 오랫동안 육성회장으로 일했다. 그러는 중 불우청소년들의 안타까운 현실을 보게 되었고 그들을 도와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후학 양성이 내 평생의 꿈이다. 내 호를 딴 중산장학회를 만들려고 한다. 또한 고향의 발전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싶다. 아울러 군민과 향우들간 친화단결을 노력하겠다.

- 수상 경력과 가족 관계는

= 국가 산업 발전 기여 공로로 1998년 김대중대통령님으로부터 표창장과 감사장을 받았다. 1987년에는 건설부장관 표창장, 1984년에는 내무부장관 표창장을 받았다. 그 외 철도청, 광주시장, 전라남도지사, 대전광역시, 목포시 등에서 받았다. 가족은 동반자 송숙예(85), 딸 옥애(61)는 미국에서 병원을 경영하고 있다. 큰 아들 승철(49)은 대학 교수이다. 작은 아들 관행(45)은 내 일을 도와 부사장으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