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입력 2008.04.28 19:02

나라사랑의 결정체 대한민국 임시정부



<목포보훈지청 보훈과장 김용암>


4월에는 조상의 산소를 찾아 제사를 지내고 사초(莎草) 등을 통해 묘를 돌아보며 조상의 은덕을 기린다는 한식(寒食)이 있다.
절기상 청명, 한식 때가 되면 삼천리 산하는 봄꽃들의 향연이 절정에 달한다. 사람들은 봄꽃들의 향연을 즐기기 위해 산이며, 유원지들을 찾느라 부산하기만 하다.
봄꽃들의 향연을 즐기는 것도 의미가 있고, 한식을 맞아 조상의 은덕을 기리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맘때쯤이면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기념일을 기억하고 선열들의 위국헌신 정신을 되새겨 보는 것 또한 값진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늘을 향해 산하 가득 손을 벌린 봄꽃들 마냥 삼천만 민족의 염원 가득한 마음과 마음들이 모여 1919년 4월 13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상하이에서 수립·선포되었다.
1919년 3월 1일 우리 민족은 혼연일체가 되어 잔인하고 극악무도했던 일본제국주의에 대항에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삼천리 방방곡곡 울려 퍼진 우리 민족의 염원에 간담이 서늘해진 일본제국주의는 총칼로 무자비하게 그 염원을 짓밟았고 삼천리 산하는 떨어진 진달래 마냥 핏빛으로 물들었다.
그러나 우리 선열들은 그들의 총칼 앞에 무릎을 꿇지 않았다. 오히려 하나로 뭉쳐 만들어낸 것이 바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인 것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은 국내에서 3·1운동 이후 이를 통합할 수 있는 민주적 정부형성의 의지와 해외각지에서 성숙된 민주공화적 자립의욕의 결과에 의해 복합된 삼천만 민중의 욕구분출로 가능해졌다.
지역적인 이점을 고려하여 상하이에 자리를 잡은 임시정부는 신규식(申圭植)의 터 잡기와 이동녕(李東寧)·이시영(李始榮)의 다양한 민주공화적 전력을 승화·연결시켜 3권 분립의 민주공화정부를 탄생시켰다.
먼저 이동녕의 주도로 임시의정원을 구성하고 여기서 임시헌장 10개조를 제정·공포한 뒤 국무총리와 6부의 행정부, 국무원을 구성했다. 이어 1919년 4월 13일 의정원과 사법부의 3권 분립을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민주정부를 출범시켰다
3권 분립의 국가적 틀을 제대로 갖춘 임시정부는 1945년 11월 우리 민족의 아버지라 일컬어지는 김구(金九) 선생이 환국할 때까지 국내외의 독립운동을 통제·통할하는 구심점으로서의 사명감을 가지고 민족자주독립을 최대의 목표로 내걸었다.
이때 임시정부가 내걸고 투쟁했던 독립운동은 단순한 소 집단적 항쟁차원이 아닌, 이념을 동반한 광복 정책적 측면에서 국가적·정부적 기능으로서의 면모와 성격을 띠고 있었으며 이는 우리 민족 스스로 대한민국을 이끌어 갈 수 있다는 역량을 세계에 알린 것이기도 하다.
비록 일본제국주의를 능가하는 군사력을 갖지 못해 미국, 소련 등의 도움을 받아 광복이 이루어졌지만 임시정부의 국가적·정부적 역량이 없었다면 도움을 준 나라들에 의해 당연히 신탁통치가 이루어졌을 것이고 그것은 형태만 바뀐 또 다른 식민지 지배 체제 형태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임시정부 등을 통해 국가적·정부적 역량이 가능하다는 것을 충분히 보여주었기에 이념의 혼란이 있긴 했지만 우리 스스로 나라를 이끌어 갈 수 있었던 것이다.
상해시대(1919~1932), 이동시대(1932~1940), 충칭시대(1940~1945)로 일컬어지며 27년 동안 조국의 광복을 위해 힘써온 임시정부는 이봉창에 의한 도쿄 일왕폭살 의거, 윤봉길에 의한 홍커우공원 투탄의거 등을 이끌었으며 광복군을 창설해 일본제국주의에 선전포고를 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치다 일본의 패망을 맞이해 귀국하게 된다.
잔인할 정도로 아름다운 까닭에 4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했다는 말처럼 삼천리 가득 너무나 아름다운 4월이다.
이 아름다운 산하를 우리가 즐길 수 있는 것은 이를 지켜내기 위해 칼날 같은 일본제국주의의 폭거에 맞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세우고, 목숨을 바쳐 지켜내고 활동하신 이름 모를 애국 열사들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그분들의 나라사랑 정신을 기리고 그 마음을 우리들 가슴 가득 새기는 4월이 된다면 그 아름다움이 몇 십 배가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