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입력 2008.03.31 10:01

마음으로 보는 세상



춥고도 긴 겨울이 지나고, 햇살의 손길을 받아 얼었던 땅이 녹고, 그사이로 푸릇푸릇 봄 냄새와 함께 시작을 의미하는 계절, 생동감 넘치는 봄, 싱그러운 향기가 가득합니다.
이봄과 함께 설렘으로 또 한편 두려움과 기대감으로 일을 시작한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세 번째 봄이 찾아 왔습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지요, 그래서 내 마음을 다 잡고자 보훈 도우미로서 처음 어르신 댁을 방문 했을 때 기억을 다시금 꺼내어 봅니다.
그날도 봄 햇살이 좋은 따뜻한 봄이었습니다.
댓돌에 가지런히 놓여있는 신발을 보고 “계세요~” 하고 방문을 열어보니 불빛하나 없는 어두 껌껌한 방안에서 풍겨오는 곰팡이 냄새와 눅눅한 기운에 나도 몰래 인상이 구겨졌습니다.
그도 잠시 방안에서 “누구요. 누가 왔소” 하고 방문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할머니는 초췌하고, 몸이 굳어 있는 듯 했습니다. 방안 여기저기엔 입다만 옷가지며 양말짝이 뒹굴고 방바닥은 온기하나 없이 냉랭해서 차라리 밖에 봄 햇살이 나을 듯싶었습니다.
그래서 방문을 활짝 열어놓고 정리정돈이며 청소를 다 하고 나서야 할머니가 앞을 전혀 볼 수 없다는 걸 알았습니다.
시각 장애 1급인 할머니는, 그래도 집과 동네에서는 몸의 일부나 다름없는 지팡이 하나면 못 가실 곳이 없고 목소리만 듣고도 누구누구 아제, 누구 며느리, 어느 집 손자하고, 다 알아 보시지만 그곳을 벗어나게 되면 또 다른 세상의 첫발을 내딛는 사람처럼 꼭 누군가에 손을 잡고 이끄는 데로만 다니셔야 하고, 이것은 이것, 저것은 저것 하나하나 설명을 해드려야 한답니다. 비록, 돌아서 지나면 여전히 또 다른 세상으로 남지만요...
하지만 할머니는 그 어려운 현실과 여건 속에서도 홀로 손자 손녀 다섯을 모두 고등학교까지라도 졸업을 시켜서 지금은 각자 사회생활을 하고, 현재 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막둥이 손자와 함께 서로를 의지하면서 살아가고 계십니다. 그렇게 시작한 할머니와의 인연이 벌써 세 번째 봄을 맞이하네요.
그동안 나도 사람인지라 너무 가슴이 아프고 답답할 때는 좀 더 친절할 수 있음에도 거칠어지기 일쑤고, 좀 더 상냥할 수 있음에도 무뚝뚝하고, 좀 더 자상할 수 있음에도 소홀히 대화할 때가 있고, 몸과 마음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할머니는 그럴 때마다 네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토닥토닥 위로를 해주신 답니다. 내 어찌나 죄송하고 부끄러웠는지...
이제는 서로가 오래전부터 알아온 사이처럼 서로 의지하고 기다리며 일주일에 한번이지만 “할머니”하고 방문을 열고 들어서면 따뜻하게 두 손을 꼭 잡아 주시고 어쩔 땐 일부러 청소를 대충 다 해놓으시고는 “나 커피가 먹고 싶은디 커피나 맛있게 타줘” 하시며 애교를 부리실 때도 있습니다.
얼마나 사람이 그리우셨으면 누군가 문을 두드리며 찾아와 주시는 것만으로도 고마우시답니다. 더구나 손자 녀석 방학도 끝나 기숙사 생활을 하는데다 농사철이 다가오면서 그나마 몇 분 계시던 할머니들마저도 논으로, 밭으로 나가 일손을 돕는 바람에 혼자 나설 수 없는 할머니로선 날마다 다니시는 병원도, 사흘에 한번, 나흘에 한번으로 줄어 여기저기 쑤시고 아파도 참을 수밖에 없어 할머니 건강도 걱정이 됩니다.
드시는 것과 생필품은 한 번씩 방문할 때 사다 드리지만 그것만으로는 불편하고 부족한 점이 많은데, 찾아 뵐 때마다 환하게 반겨주시는 할머니를 보면 앞으로는 내가 몸과 마음으로 한 발짝 더 다가가 보다 더 세심하게 보살펴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할머니! 비록 일주일에 한번이지만 볼 때마다 건강하고. 우리 웃으면서 오래 오래 지내요. 그리고 할머니, 마음으로 보이는 세상도 많이 가르쳐 주시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