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입력 2008.02.18 10:04

애국의 함성, 2·8 독립선언을 되돌아보며…




온 국민의 염원 속에 지난해 말, 우리는 앞으로 5년 동안 대한민국이라는 거대한 배를 이끌어 갈 새로운 대통령을 뽑았다. 경제를 살리겠다는 새 정부의 여러 정책들에 국민의 모든 관심이 쏠리면서 우리가 정작 중요한 것들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안타깝기도 하다. 
2월 8일은 “조선청년독립단은 우리 2천만 민족을 대표하여 정의와 자유의 승리를 득(得)한 세계의 만국 앞에 독립을 기성(期成)하기를 선언하노라”로 시작하는 2·8 독립선언이 1919년에 선포된 날이다.
미국 대통령 윌슨이 제창한 민족자결주의와 파리 강화회의 및 국제연맹에서 한국을 비롯한 약소민족 대표들의 발언권을 인정해야 한다는 보도 등을 접한 것이 계기가 되었고 직접적으로는 재미 한국인들이 한국인의 독립운동에 대한 미국의 원조를 요청하는 청원서를 미국 정부에 제출했다는 보도를 접한 재일 유학생들 사이에서 독립운동의 분위기가 고조되면서 이루어진 것이 바로 2·8 독립선언이다.
동경 조선유학생 학우회는 1919년 1월 동경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웅변대회를 열어 독립을 위한 구체적인 운동을 결의하고 실행위원으로 최팔용, 김도연, 백관수 등 10명을 선출하였다. 실행위원들은 조선청년독립단을 결성하고 ‘민족대회 소집청원서’와 ‘독립선언서’를 작성하여 송계백을 국내로, 이광수를 상해로 파견한다.
선언서와 청원서를 각국 대사관, 공사관 및 일본정부, 일본국회 등에 발송한 다음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유학생대회를 열어 독립선언식을 거행하였으나 무자비한 일본 제국주의의 첨병인 경찰에 의해 강제해산이 이루어지고 실행위원 10명 등 27명의 유학생이 체포되는 등 갖은 핍박을 받게 된다.
그러나 진흙 속에서 피어나는 연꽃처럼 일본 제국주의의 심장부에서 피어난 독립에 대한 열정이 한민족에게 고스란히 전해져 3·1운동의 기폭제가 되어 독립운동의 찬란한 꽃을 피운다.
우리 민족 최대의 명절 설날에 오랜만에 가족이 만나 행복한 시간을 보내며 새 정부에 대한 기대를 표현하는 것도 의미 있겠지만 다른 곳도 아닌 일본제국주의의 본토에서 “일본이 만일 우리 민족의 정당한 요구에 불응할진대 우리 민족은 일본에 대하여 영원히 혈전을 선언하노라”라고 외쳤던 피 끓는 애국 청년들의 나라 사랑 정신, 그 정신을 되돌아보는 것이 더더욱 의미 있는 일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