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입력 2007.08.30 15:03

북간도 근대 교육의 요람 서전서숙



(서전서숙의 설립자 이상설(중앙)과 이준, 이위종)


 


 ■ 서전서숙의 출발
 북간도 근대교육의 요람인 서전서숙은 1906년 10월에 독립투사 리상설에 의해 문을 열었다.
 리상설은 을사조약 파기운동 후 자택에 은거하여 거의 표면적으로 정치활동에 참여하지 않은 것 같이 행동을 했지만 은밀하게 전덕기(全德基)를 중심한 상동청년회에서 활동하던 리화영, 리동녕, 유완무, 장유순, 리시영 등과 의논하여 국외망명과 구국운동의 새 방법을 찾고 있었다.
 그리하여 1906년 4월 18일, 국권회복을 결심한 리동녕, 정순만 등과 같이 망명의 길을 떠나 그 해 8월 당시 북간도의 문화, 경제 중심지인 룡정에 도착한 것이다.
 리상설은 자기 돈으로 당시 룡정에서 제일 큰 집인 천주교 회장 최병익의 집을 사서 학교로 고치고 서전서숙을 개교시켰다.
 리상설은 1870년 12월 7일 대한민국 충청북도 진천군 덕산면에서 태어났다. 그가 25살 때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으나 1905년 을사 매국조약이 강제로 체결될 때 의정부의 참찬직에 있었다.
 을사조약이 반포되자 일제의 침략을 반대하는 민족 항쟁이 일어나자 리상설은 벼슬길을 버리고 민족의 앞날을 위해 망명을 결심했던 것이다.
 서전서숙의 건물은 약 270평방미터로 처음엔 인근의 청소년 22명을 모아 신교육을 가르쳤는데 다음 해 학교가 문을 닫을 무렵에는 70여명으로 불어났다.
 리상설은 서전서숙의 숙장으로 그리고 리동녕과 정순만은 학교운영을 맡았는데 직접 역사와 지리, 수학, 헌법, 국제법 등 근대교육을 실시했고 항일민족교육을 가르쳤던 것이다.
 리상설은 학교운영에 필요한 모든 경비를 사비로 충당했고 교원의 월급과 학생들의 학용품 비용까지도 전액 부담하는 무상교육을 실시했다.
 ‘서전’이란 이름은 당시 그곳 지방을 총칭하는 지명이었고 처음에는 학생들을 갑, 을 반으로 나누어 갑반은 고등반이고, 을반은 초등반이며 갑반에는 20세 전후의 청년 학생들도 있었다.
 갑반 20명, 을반 20명, 그리고 병반에는 34명의 학생이 있어 후에는 74명이나 되었는데 그 이듬해인 1907년 4월 3일 리상설이 고종의 밀사로 헤이그로 떠나자 학교는 재정난에 허덕이게 되고 더구나 룡정에 일제통감부 간도 파출소가 들어서면서 서전서숙에 대한 감시와 방해가 심해져 그 해 10월경에 문을 닫고 말았다.
 서전서숙은 비록 1년 미만의 짧은 역사였지만 민족주의 교육으로 근대적 민족운동을 선도할 인재양성을 목적으로 이념과 사상은 그대로 후일 명동학교와 신흥학교로 이어졌고 멀리는 국내ㆍ외 각 지방마다 조선인이 살고 있는 곳이면 어디서나 서전서숙과 같은 민족주의교육이 확대되었다.
 서전서숙이 문을 닫자 박무점 등은 장재촌에 가서 김약연과 토의한 후 1908년 4월 27일에 규암제 서당을 사립 명동서숙으로 이름을 고치고 신학문 교육을 실시하면서 명동학교로 발전시켰다.
 리상설은 1907년 6월 네델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여 일제의 만행을 각국 대표들에게 폭로하며 국권회복을 주장하다가 실패하자 그 길로 프랑스와 독일, 영국, 미국 등 각 나라를 방문한 뒤 다시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가 망명정부를 세우려고 애썼다.
 또한 1910년 8월, 권업회를 설립하여 산업진흥에 힘쓰는 한편 하바로프스크로가 군정부와 사관학교를 세워 무력항쟁을 시도했으나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서간도에서는 1911년에 리동녕, 리희영, 리시영, 김창환, 리상룡 등이 망명하여 신흥강습소를 세워 신흥무관학교로 발전시키면서 민족운동의 인재를 양성했는데 여기서도 서전서숙의 교육목표와 그 방법을 따랐던 것이다.
 리희영과 리시은 형제로서 리상설 과는 죽마고우 사이였으며 시베리아 불라디보스토크의 한민학교와 북간도 밀산부의 한민학교 등도 모두 성격이 비슷했다.
 리상설은 하바로프스크에서 군정부와 사관학교 설립에 실패를 한 후 사무쳐 오르는 통분으로 침식을 잊고 지친 끝에 병든 몸을 이끌고 신음하다가 1917년 음력 2월 9일 천추의 한을 품고 이국땅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지금은 룡정실험소학교 교정에 ‘서전서숙’의 옛터 유적지 기념비만이 지난날의 가슴 아픈 역사를 말해주고 있을 뿐이었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