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입력 2007.08.11 11:02

민족시인 윤동주와 청년문사 송몽규


민족시인 윤동주의 모교인 대성중학교 건물


 


 죽는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민족시인 윤동주는 1917년 12월30일 당시 중화민국 동북부 만주에 위치한 간도성 화룡현 지신사 명동촌에서 태어났다. 지금의 중국 길림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 용정시 지신향 명동촌이다.
 동북서로는 원만한 호선형 구릉이 병풍처럼 마을을 감싸고 있고 서북쪽에는 선바위라 부르는 삼형제 바위들이 하늘 높이 우뚝 솟아 절경을 이루며 매서운 서북풍을 막아주어 아늑한 우리 민족의 보금자리였다.
 1925년 4월 4일, 윤동주는 아홉 살의 나이로 명동소학교에 입학을 했다.
 함께 입학한 고종사촌 형인 송몽규는 말 잘하고 엉뚱한데 비하여 윤동주는 성품이 순하고 어질어 꾸지람이라도 듣게 되면 금세 눈물이 핑 돌았다.
 송몽규와 윤동주는 둘 다 문학을 좋아하는 소년들이었다. 윤동주가 초등학교 4학년 시절, 서울에서 발행하는 <아이생활>잡지를 주문해서 애독하고 있었고 송몽규는 <어린이> 잡지를 구독하여 읽고 있었다.
 5학년이 되자 윤동주는 송몽규와 함께 <새명동> 잡지를 만드는 일에 적극 나섰고 윤동주의 학급은 문학소년반이라고 불릴 정도로 적극적이었다.
 졸업할 때 기념품으로 김동환의 시집 <국경의 밤>을 갖게 되었는데 1931년 3월 25일 명동소학교를 졸업한 윤동주는 마을에서 10여리 떨어진 당시 화룡현 현청 소재지인 대립자에 있던  중국인 소학교 6학년에 송몽규, 김정우 등과 같이 편입되어 1년 동안 공부를 하게 되었다.
 다음해인 1932년 윤동주는 송몽규와 함께 캐나다 선교부에서 세운 은진중학교에 입학을 하게 되는데 은진중학교 시절의 윤동주는 축구선수로 활약하는가 하면 웅변에도 능하였고 윤석중의 동요 동시에 심취되어 있었다.
 1935년 9월 1일 은진중학교 4학년 한 학기를 마친 윤동주는 평양 숭실중학교로 전학을 하게 되는데 편입시험에 떨어지는 바람에 다시 3학년을 다니게 된 것이다.
 이 때 윤동주는 심리적으로 많은 고통을 받았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삶의 고뇌를 슬퍼하고 반추하는 과정에서 그의 대표작인 <서시>가 탄생된 것이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 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감수성이 예민하고 자존심이 강한 18세 문학청년 윤동주는 견디기 어려운 고뇌를 잘 참고 이기며 시 창작을 통해 승화시켰던 것이다.
 1936년 3월 일제의 신사참배강요에 대한 항의표시로 숭실중학교를 자퇴한 윤동주는 문익환과 함께 용정으로 돌아와 광명학원 중학부 4학년에 편입을 했다.
 그 후 1938년 4월 9일 서울에 있는 연희전문에 입학시험을 쳐 합격을 하고 송몽규와 함께 입학을 하면서 새로운 변화 속에서 창작의욕은 불타올랐다.
 그리고 연희전문 문과 졸업 후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가 1942년 4월 2일 동경립교대학 문학부 영문학과에 입학하게 되는데 해방을 눈앞에 둔 1945년 2월 16일 옥사할 때까지 일본 땅에서 <흰 그림자> <흐르는 거리> <사랑스런 추억> <쉽게 씌어진 시> <봄> 등의 시를 남겼던 것이다.
 1943년 7월 14일 경도에서 독립운동혐의로 체포되어 1944년 3월 31일 징역 2년을 언도 받고 1945년 2월 16일 오전 3시 36분 일본의 후쿠오카 형무소 안에서 간악한 일경의 생체실험대상으로 이름 모를 주사를 맞다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스물아홉의 젊은 나이에 옥사를 하고 말았다.
 1945년 6월 15일 윤동주 시인은 자신이 태어나서 자란 북간도 땅 고향 용정의 동산교회 묘지에 묻혔다.
 청년문사 송몽규, 그는 1917년 9월 28일 지금의 용정시 지신진 명동촌에 있는 외갓집(윤동주 생가)에서 당시 명동소학교에서 조선어를 가르치던 송창희 선생과 윤동주 시인의 고모이자 독실한 기독교신자인 윤신영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렸을 적부터 남달리 총명하고 활동력이 강했던 그는 공부도 잘하고 매사에 적극적이었다.
소학교 4학년 시절에 <어린이> 잡지를 서울에서 주문 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