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입력 2007.07.21 13:00

반일운동의 산실 용정중학과 3ㆍ13 독립운동



   사진설명 : 용정시 지신향에 있는 3ㆍ13 반일의사 묘지



 ●밝은 조선 일으킬 인재양성에 총력
 1908년 김약연은 서전서숙이 일제의 탄압으로 폐교된 후 박우림을 초빙하여 각 마을에 있던 서숙들을 합병하여 ‘명동서숙’으로 확대하고 박우림을 숙장으로 자기는 학감을 맡아 김하규, 김하연, 남위언 등을 교사로 근대교육과 본격적인 반일교육을 시켰다.
 1909년 신민회에서는 정재면을 북간도로 명동에 파견했는데 명동에서는 그를 명동서숙의 교사로 초빙을 했으나 정재면은 “마을전체 주민들이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명동서숙에서 성경과목을 정식과목으로 가르칠 수 있도록 보장해야만 초빙에 응하겠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만약 자기의 요구를 들어준다면 자기뿐 아니라 다른 유능한 교사들도 추천하겠지만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경우 다시 한국으로 되돌아가겠다는 것이었다.
 당시의 이러한 요구는 조상대대로 유교를 신봉해오던 유학자들에게 있어서는 도저히 응할 수 없는 청천벽력과 같은 요구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명동촌에 살고 있던 민족지도자들은 이 문제를 놓고 장차 나라를 되찾고 밝은 조선을 일으켜 세울 인재를 육성시켜야 된다는 대명제 앞에 개인들의 의견이나 기득권을 포기하기로 하고 장장 3일 동안이나 계속된 쟁론 끝에 대를 이어 숭상해오던 유교를 단호하게 포기하고 정재면의 요구를 받아들여 명동촌 마을 주민 전체가 기독교를 받아들이기로 결정을 한 것이다.
 당시 정재면은 캐나다 선교부의 주선으로 유학을 갔다 온 근대교육의 뛰어난 교사였다.(후일 한국신학대학 학장을 지낸 정대위 박사가 그의 아들이다.)
 1909년 명동서숙은 명동학교로 이름을 바꾸고 당시의 쟁쟁한 학자들인 박태현, 장지연, 황의돈 등 열렬한 항일의사들을 교사로 초빙하여 본격적인 근대교육을 실시함과 더불어 명동부락에 교회를 설립하게 되었다.
 명동촌에서의 획기적인 변화는 주변뿐만 아니라 우리민족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는데 그것은 단순히 기독교를 신봉하는 문제가 아니라 바람 앞에 꺼져가는 촛불처럼 나라와 민족의 앞날이 위태로운 시기에 새로운 문화를 과감하게 받아들이고 낡은 문화사상과 결연히 단절한 후 기독교라는 신앙조직을 통하여 진보적이고 민주적인 근대문화를 수용했다는 의지를 보여 주었다는 것은 훗날 우리민족사에 커다란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이렇듯 경천동지할 변화는 오로지 후일에 내 나라를 일으켜 세우고 짊어지고 나갈 인재를 길러내야 한다는 원대한 포부와 목적을 위해서 결단을 내려준 선각자들의 혜안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영향은 소문을 타고 주변으로 확산되었고 연변지역뿐만 아니라 가까운 소련의 연해주 지방까지 알려져 명동으로 줄을 이어 유학생을 보내기 시작했는데 명동이 이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일제나 중국당국이 기독교에 대해서는 간섭을 하지 않겠다는 정책을 펴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미년 3ㆍ13 만세운동
 1909년 말 이동휘는 전도사의 신분으로 명동교회의 부흥사경회에 참가하여 김약연과 기탄없이 민족운동에 대한 의견을 나누었고 1911년 이동휘의 건의에 의해 명동 여학부를 개설한 후 딸 이희순을 교사로 파견할 것을 약속했다.
 이때부터 명동에서는 부녀들이 야학부에서 계몽교육을 받았고 이제까지 자기의 이름조차 없이 살았던 60여명의 부녀자들은 신(信) 자 돌림으로 이름을 지어 자매관계를 맺고 솔선수범하여 간도문화운동과 교육운동에 앞장서 막대한 영향을 주었다.
 1911년 3월 13일, 서울에서의 기미 3ㆍ1운동에 대한 소식을 전해들은 간도의 민족지도자들은 용정에서 3만 여명이 모여 일제의 만행에 대한 규탄대회를 열었다.
 명동학교에서는 이웃학교와 연대하여 300여명의 충열대를 조직하여 시위운동에 앞장을 섰는데 이 가운데 일본군과 중국군의 총칼 앞에 19명이 희생되고 48명이 부상을 당하였다.
 이 3ㆍ13반일운동으로 인해 다음해인 1920년 일제는 2만 여명의 병력을 동원시켜 연변에 대한 대 토벌을 감행 우리 동포 3,400여명을 무참히 살해하고 5,000여명을 체포하였으며 3,000여 호의 민가와 36개교의 학교를 불사르고 수십만 섬의 곡식까지 불태웠던 것이다.
 또한 용정은 ‘불순세력의 소굴’로 간주하고 대토벌을 감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