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입력 2007.07.05 11:00

중국 조선족의 어머니 마을 '명동촌'


 사진 설명 : 민족시인 윤동주 선생 생가 앞에서


 세계최대의 13억 인구를 자랑하는 중국에는 56개의소수민족이 살고 있다. 그 가운데서 우리 동포 및 교민은 현재 230만 명에 달하고 있으며 연변 조선족 자치주에는 재중동포 83만 명과 한국교민 1만 명이 중국과 북한과 러시아의 국경지대를 중심으로 ‘동북아시아 황금의 삼각주’로 새 시대를 열어가고 있다.
 그 가운데서도 항일의 도시 용정은 인구 26만으로 우리민족의 첫 이민 역사와 함께 성장해온 특별한 도시이다.
 특히 행정구역상으로 중화민국 길림성 연변 조선족자치주 용정시 지신향 명동촌은 북한의 함경북도 회령으로부터 두만강을 건너 삼합진을 지나 삼합진과 용정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마을로 중국 조선족의 어머니 마을이다.
 북한의 회령에서 북으로 40리 지신진 소재지인 달라즈에서 7리 ,명동촌에서용정까지는 30리, 또한 북한의 종성까지는 동으로 50리 거리이다.
 명동(明東)이란 이름은 ‘조선을 밝게 하자’는 의미로서 장재, 이호동, 동구, 용암, 수남, 풍악, 중영상, 하촌, 성교촌, 교우촌 그리고 육도하 건너 서쪽의 대, 소사동등 10여개 부락을 합쳐서 부르는 마을 이름이다.
 이곳은 지금으로부터  126년 전인 1881년 청나라 정부에서 연변지방에 대한 봉금령이 해제되기 전후에 조선의 이주민들이 이곳에 들어와 크고 작은 마을을 형성하고 중국인 지주의 토지를 소작하며 살고 있었다.
 그 후 1899년 김약연을 중심으로 한 전주김씨 가문 31명과 김하규를 중심으로 한 김해 김씨 가문 63명, 그리고 문병규를 중심으로 하는 문씨 가문 40명, 남종구를 중심으로 한 남씨 가족 7명과 이미 먼저 명동에 들어와서 살고 있던 김항덕 등 142명이 하나의 집단을 형성하여 2월18일 조선의 종성에서부터 두만강을 건너 자동촌을 거쳐 명동으로 이주함으로 본격적인 중국 땅에서 우리민족의 이주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이 가운데 후일 북간도 대통령이라는 이름으로 존경을 받았던 민족지도자 김약연은 유학의 대가로서 맹자를 만 번이나 읽을 정도로 정통했으며 김하규는 주역에 능통했고 한북학회의 함경북도 지회장이었으며 남도천은 학문이 깊어 함경도에서 서울에 추천하여 높은 벼슬길에 오를 수 있었지만 스스로 거절한 선비로서 김약연의 은사였다.
 1900년 종성에 살던 윤하현(민족시인 윤동주의 조부)의 일가 18명이 명동으로 이주 하여 왔는데 문씨와 윤씨들은 모두 종성오현의 문하생으로 뜻이 맞고 서로 잘 아는 가족들이었다.
 그들은 모두 관북지방의 실학파였지만 벼슬길이 막혔다고 실망하지 않고 벼슬을 위해서가 아니라 글을 모르면 남에게 천시 당하며, 아는 것이 힘이다 는 철학을 갖고 양반귀족 못지않게 학문을 닦으며 이론보다는 실천을 귀중히 여겼다.
 그래서 그들은 바람 앞에 가물거리는 조국의 운명을 바라보면서 후학들을 공부와 노동이 결합된 인간으로 양성하는데 온갖 정성을 다했고 손수 집을 짓고 땅을 파며 생존과 미래를 개척하는데 앞장을 섰다 .
 그들은 단결된 공동체의 힘으로 ‘밝은 조선’을 일으키고 세울 인재를 육성하는데 온갖 노력을 다 기울였는데 집단적으로 토지를 사들여 그 가운데 제일 비옥하고 좋은 땅으로 10분의 1을 학교 밭으로 떼놓아 거기에서 나온 수확물로 서당을 운영하는데 사용했던 것이다.
이 땅을 학전 이라 불렀다.
 김약연은 장재촌에 규암제 서당을, 김하규는 대사돈에 소암제를 남위원은 중영촌에 한함서재를 세운 후 후학들에게 학문을 가르치면서 농사를 지었고 이렇게 한뜻을 갖고 1899년에 모인 142명의 집단이주민을 핵심으로 ‘새조선인 마을’인 명동촌이 뿌리를 내리게 된 것이다.
 1907년 8월 일제 제국주의는 ‘조선 사람을 보호 한다’는 구실로 연변지방에 붉은 마수를 뻗쳐 용정에 조선통감부간도파출소를 세우고 명동촌 주변에 헌병파견소를 설치하더니 1909년 9월 ‘간도협약’이 체결된 후부터는 노골적으로 우리민족을 감시하고 통제하기 시작하자 연변에서 활동하던 이동녕 이상설, 여준 등은 연변을 떠날 수밖에 없었지만 명동촌에서는 일제의 감시와 통제를 지혜롭게 피해가면서 반일운동을 계속 진행하는 한편 더욱 단합하여 학교 교육을 통해 후대들을 반일인재로 양성하는데 더욱 박차를 가했던 것이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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