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입력 2007.06.08 11:00

설립 109주년 맞은 대동면 용성교회
- 1898년 목포선교부 배유지(E. Bell) 선교사에 의해 설립 -



               
 호남가의 첫 머리에 등장하는 우리 고장 咸平은 구석기 시대부터 사람들이 살았고, 기원전 2~3세기경에는 청동기를 제작할 수 있을 정도의 부유한 집단이 거주했다는 근거를 나산면 초포리 사촌에서 발굴된 유물들이 입증하고 있다.
 원삼국시대에는 마한에 속하였고 백제시대에는 굴내현, 통일신라시대(757)에는 함풍현, 후백제시대를 거쳐 고려시대 그리고 조선시대 태종 9년(1409) 1월 18일 함풍현과 모평현을 하나로 합쳐 ‘함평현’이라 했으며 고종 32년 (1895) 5월 26일에 함평군으로 개칭하였다.
 개군 600년을 불과 2년을 앞둔 우리고장 함평에 기독교가 들어온 것은 지난 1898년에 처음 복음을 받아들여 예배를 드렸던 대동면 용성교회와 함께 올해로 109주년이 된다.
 1898년 5월경부터 함평군 나산면 원선리 논골에서 몇몇 사람이 모여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는 이야기가 구전으로 내려오고 있다.(최기신, 서부례 씨 증언)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 연감에도 1898년 5월 10일에 함평군 성정리에 교회가 설립된 것으로 기록이 되어 있고,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72쪽 13째줄 )에 의하면 1900년 봄에 나주군 삼도리 교회에서 함평군 성정, 나주, 마암, 방독 등에서 교회를 분립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필자는 설립과 분립에 대한 해석을 이렇게 하고자 한다. 용성교회는 1898년 5월 10일에 설립되어 예배를 드리던 중 1900년 봄에 분립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지난 2005년 함평군 기독교 선교 100주년 기념 사업회에서는 선교 10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함평군 기독교 연감을 출간했는데 이곳에서는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에 기록된 1900년 봄을 용성교회 설립기념일로 잡고 선교 105주년 기념비를 세운바 있다. 그러나 차지에 용성 교회 설립 일을 1898년 5월10일로 바로 잡아야 한다고 본다.
 109년의 역사를 가진 용성교회는 지난 1905년 서경구, 손원중, 정도현, 최백한, 최치문 등의 정성어린 헌물로 성정부락에 예배당을 건축했다.
 그리고 그 후 호정부락으로 이전을 했는데 정확한 연대를 기록상에서 찾을 수 없다.
 용성교회는 1916년 용성리 금성동으로 교회당이 옮겨졌으며 1920년에는 나장환(나덕환), 윤영환(서경구 손녀사위) 씨에 의해 소학교를 설립 운영하기도 했다.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부터 해방되기 직전까지 교회는 숱한 박해와 어려움을 당하고 바람 앞에 가물거리는 촛불마냥 위태로웠지만 덕산리로 옮겨 서종옥 씨가 주도하여 예배당건축을 90%정도 마쳤지만 공산당들에 의해 처참히 파괴되고 말았다.
 하는 수 없이 용성리 용현부락에 있는 정복례씨의 골방에서 숨어 예배를 드리다가 1953년에는 대동면 용성리 1000번지에 새 교회당을 건축했다.
 6.25 전쟁 기간에는 주일예배를 드리다가 공산당들의 습격을 받아 온몸을 난도질당했던 진용현, 노양수 집사가 기적적으로 살아나 목회자가 되기도 했다.
 1996년 3월 23일 대동면 용성리 552-3번지에 820평의 대지를 구입 먼저 사택을 건축하고 동년 4월 6일에는 용성리 552-4번지에 새 예배당을 착공하고 2002년 4월 5일에는 예배당 헌당식 및 장덕기, 장종만 장로의 임직식과 김종인, 박승규 안수집사 임직식, 김순자, 모연순, 심방자 권사 취임식을 가졌다.
 용성교회는 함평군 기독교선교의 모태교회로서 2005년 4월 26일 함평군 기독교선교 100주년 기념 사업회에서 추진한 선교 105주년 기념비를 이석형 함평군수를 비롯한 이낙연 국회의원 등 200여명의 자치단체 기관장 및 교계지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교회 앞 잔디밭에 세웠다. 비문은 이 고장 출신 시인이자 아동문학가인 김철수 박사가 썼다.
 현재는 담임 박성익 목사와 2005년 12월27일 제14대 교역자로 부임하여 이건섭 , 장덕기, 장종만, 장로와 함께 160여명의 성도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하여 함평의 모교회로서의 책임을 잘 감당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