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입력 2007.04.25 10:04


 
 


 함평 태생인 이수복 (李壽福) 시인을 생각하면 문득 정주의 고월(素月), 강진의 영랑(永郞)과 함께 고창이나 서울의 미당(未堂)이 연상되곤 한다. 향토성 짙은 전통정서와 한(恨)의 숨결이 잇다은 시 미학의 구현자라는 점에서 그렇다.


 시인(詩人)께서는 한국 전란의 포성이 멎은 무렵, 「冬柏꽃」「봄비」 등으로  미당의 추천을 받아 박재삼, 황금찬, 문덕수보다도 먼저 시단(詩壇)에 올랐다. 교편을 잡으며 1955년 《현대문학》에 등단한 이래 30여년  동안 주옥같은 시 130 여 편을 남기고 62세에 교직에서 돌아가셨다.


 이수복 시인을 회상하면, 1960년 학생혁명이 일어난 그해 여름 한낮에 광주 천변의 방림동 단층집 한옥의 작은 방에서 뵙던 선생의 자태가 선연해 온다.


 사모님이 내어 온 풋과일을 함께 드시며 처음 만난 고향 청년에게 건넨 조용한 말씨와 준수한 얼굴의 안경너머 그윽한 눈빛이 마냥 정겨웠다. 그즈음엔 일상에 쫓겨 자주 못가지만 함평 고을은 도심생활 틈틈이 마냥 그리워지는 탯자리라고. 


 흔히 이수복의 시문학은 정한(情恨)에 겨운 전통적인 순수 서정과 고독, 절제, 기독교적 요소 및 귀뚜라미란 뜻의 ‘실솔蟋蟀, 해골이란 의미의 ’촉루髑髏’ 같은 한자 투 시어(詩語) 활용 등이 그 시의 특성으로 지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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