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경하고 사랑하는 조합원여러분!지난해 우리농협 제15대 조합장으로 취임하여 업무를 시작하면서 가장 고민했던 부분이 ‘조합원여러분이 바라는 농협, 농협다운 농협의 역할이 무엇일까?, 농협이 과연 농민조합원 여러분께 어떤 존재일까’ 하는 것이었습니다.저의 결론은 신뢰였습니다.농협의 존재목적은 죽어도 농민조합원일 수밖에 없고 조합원에게 신뢰받지 못한 농협은 농협으로서 존재 가치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존경하는 조합원여러분!작년 한 해 동안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는 것보다 당장의 현실에서 개선할 점이 무엇인지 그 해답을 찾기 위해 임직원 모두
정월이 되면 아무리 눈이 많이 내려도 봄이 가까워짐을 느낄 수 있다. 이는 귀로 듣는 봄이 오는 소리뿐만 아니라 몸으로도 봄이 오는 소리를 듣는 것이다. 꽃샘추위가 봄소식을 훼방 놓는다 해도 훨씬 부드러워진 눈의 질감에서 남해바닷가 어디께를 북상하고 있는 봄의 입김을 느낄 수 있다. 차디찬 물속으로 곤두박질쳤다가 물 위로 얼굴을 내미는 비바리들이 내쉬는 휘
옛날엔 가을하늘이 유난히 푸르고 높았다. 오늘날은 대기오염 등 환경오염으로 하늘은 뿌옇고, 산에 올라 도시를 바라보면 도시가 스모그 때문에 침침하게 보인다. 비가 개인 후 어쩌다 운 좋은 날 바다 건너 마을이 청명하게 보일 정도이다. 옛날엔 금수강산으로 불리던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풍경과 더불어 물이 맑고 공기도 맑고 하늘도 맑았다. 특히 가을은 &lsquo
이제 며칠 후면 설이다. 그동안 시대의 흐름에 우리 민족 최대의 명절인 설의 풍속도와 설의 의미가 많이 변한 것이 사실이다. 시대가 변하면서 세시풍속도 그 시대에 맞게 변하기 마련이지만 내 유년의 설을 떠올리다가 오늘날 우리가 지내는 설을 생각하면 왠지 씁쓸한 마음 감출 길이 없다. 본래 설이란 ‘근신(勤愼)하다’ 즉 ‘삼가
옛날에는 소나무 가지가 휘어질 정도의 눈이 서정적으로 내렸었다. 더불어 사흘은 따스하고 나흘은 매서운 날씨를 보였는데 특히 바람이 많이 불었다. 추운 날 바람이 불면 아버지는 아궁이에 장작불을 지피시고 어머니는 고구마를 쪄냈다. 간식거리로는 고구마가 그만이어서 말랑말랑한 찐고구마는 달착지근하게 맛있었다. 문밖에는 눈보라가 치는데 문풍지에서 소리가 났다. 지
초등학교 6학년 때 중학교 입시공부를 하느라고 학교 뒷산 당마산 너럭바위에 올라가 공부를 할 때, 누군가 교실에서 부르는 하모니카 소리가 내 마음 속의 슬픔과 우수를 깨웠다. 아직 열두 살의 어린 나이였지만 늬엿늬엿 지는 해를 배경삼아 듣는 하모니카가 들려주는 「섬집아기」라는 동요는 절창이었다. 바닷가 마을에 사는 나는 바닷가에 나갔다가 저녁무렵 집으로 바
아침 저녁이면 부엌에서 들리는 어머니의 도마질 소리가 즐거웠다. 먹을 것이 별로 없는 시절이었지만 어머니는 무엇을 써시는지 도마질을 하셨다. 어머니의 도마질 소리에 특별할 것도 없는 밥상이 차려지곤 하였지만, 그러나 그 소리는 허기진 아이들의 식욕을 일깨웠다. 어머니가 도마질을 하는 날은 깍두기나 채를 썰 때, 김치를 썰 때, 그리고 마늘을 쪼을 때, 어쩌
가을이 되면 나는 시인이 된 것 마냥 풀벌레 우는 소리를 들으며 시심을 키웠다. 지금 생각하면 어린 날의 시심이라는 것은 무척 유치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나의 시심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따가운 여름날이 저물어갈 무렵부터 저녁 때가 되면 제법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이때 쯤이면 집안 마루 밑이나 댓돌 아래, 또는 뒤안 어디선가에서 귀뚜라미가 울었다. 낮에는
옛날부터 마당은 공동체적인 삶을 구현하기 알맞은 공간이었다. 여름엔 마당에 멍석을 깔고 저녁밥을 먹고 누워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곤 하였다. 집안의 대사인 혼례 치루는 일은 물론 어른이 돌아가시면 차일을 치고 문상객을 맞고 장례를 치뤘다. 팔월 한가위엔 동네 처녀들이 모여 강강술래를 부르며 빙글빙글 마당을 돌았다. 정월 보름날엔 농악패들이 한해 농사를 기원하
강 경 호 (시인, 문학평론가) 오늘날에는 둠벙에서 물 푸는 소리를 들을 수 없다. 관계시설이 좋아지고 펌프가 잘 보급이 되어 쉽게 물을 끌어들일 수가 있기 때문이다. 가뭄이 심한 때는 저수지의 수문을 열면 농부들은 삽을 들고 논에 나가 수로를 얼쩡거리며 자신의 논에 물을 대려고 야단이었다. 서로 물을 대려다 들판에서 큰 싸움이 벌어지는 일은 흔한 일이었다
비오는 날 부침개 지지는 소리 참 듣기 좋았다. 부침개는 주로 여름철 비오는 날 즐겨 해 먹었던 음식이다. 여름철 비가 내리는 때는 들판에 심은 모가 땅 힘을 받아 푸르러서 바람이 불면 파르라니 흔들렸다. 농사철 중에 비가 내리고 하니 조금 한가해진 때여서 부침개를 해먹기 좋은 때였다. 부침개는 특히 비오는 날 해먹는 것이 제격이다. 물론 비가 안와도 즐겨
강 경 호 (시인, 문학평론가) 오늘날에는 유치원에서부터 문자교육을 시키는 터라 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글을 터득한다. 그러나 나의 유년시절엔 유치원이라는 말을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다. 그러므로 시골에서는 초등학교에 바로 입학하였다. 그러다보니 1학년 초에는 글을 모르는 아이들이 많았다. 그렇지만 나는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글을 터득하였다. 그런데
강 경 호 (시인, 문학평론가) 나는 입시를 통해 중학교에 진학한 마지막 세대이다. 시험에 합격한 후 나는 검은색 교복과 백선이 둘러지고 가운데에 학교 모포가 박힌 모자를 아랫목 바람벽 못에 걸어 두었다. 중학교에 빨리 가고 싶어 검은 교복과 모자를 써보곤 하였다. 그러나 정작 나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것은 함평서국민학교를 다니던 어린 아이가 더 넓은 세계
강 경 호(시인, 문학평론가) 학창시절의 수학여행은 즐겁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을 충족시켜주기에 알맞기 때문이다. 중학교 때는 학교에서 수학여행을 실시하지 않아 가지 못했고, 고등학교 시절엔 부여로 갔다. 초등학교 때와 고등학교 때 수학여행을 하였지만, 수십 년이 지난 오늘에도 어찌된 일인지 초등학교 시절의 수학여행이 내 마음 속에 오롯이 남아 있다
강 경 호 (시인, 문학평론가) 나이가 들어갈수록 부럽고 아쉬운 것이 있다. 선조들의 묘를 잘 모신 풍경이 그것이다. 특히 선산 아래에 반듯한 사당까지 있는 문중의 후손들이 부럽다. 그 동안 나는 몇몇 지방의 문화유산답사기를 쓰기 위해 수많은 문화유산과 서원, 향교, 사당, 충신각을 비롯한 효자각, 열녀비 등이 있는 현장을 답사하였다. 그 중에서 사당이 잘
강 경 호 (시인, 문학평론가) 우리는 늘 어머니의 희생적인 사랑에 대해 말해왔다. 그러다보니 아버지께 죄송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묵묵히 아무말 없이 자식과 가족을 위해 깊은 사랑을 실천하신 아버지 손을 뜨겁게 잡아드린 적이 없어 마음이 아프다. 아버지는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식민지 청년으로 만주 봉천(오늘날의 심양) 벽돌공장에서 붉은 벽돌을 찍으셨다. 그
강 경 호 (시인, 문학평론가) 내가 중학교 다니던 40년 전의 함평극장은 함평읍의 최고의 문화공간이었다. 오늘날처럼 텔레비전 보급이 안 되어 있던 시절이어서 어쩌다 학교에서 영화 관람이라도 있게 되면 그 날을 손꼽아 기다리곤 했다. 학생들은 학교에서 영화 관람을 허가한 날 이외에는 극장에 출입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극장 오른쪽에 탱자나무 울타리가 있었
강 경 호 (시인, 문학평론가)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에는 기껏 뒷산이나 마을 앞 바닷가에 가본 것이 제일 멀리 간 것이었다. 마을에서 150m 쯤 거리에 있는 바다에 나가 백사장에서 아이들과 놀거나, 바다 갯펄에서 조개를 줍거나 게를 잡았다. 바다에 물이 가득차면 혼자 둑에 앉아 낚시질을 하거나 함평만에 오가는 발동선이나 풍선(風船)을 바라보며 배를 타고
강 경 호 (시인, 문학평론가) 지금 생각하면 우습지만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는 아무렇지도 않게 당연한 것들이 있었다. 특히 60년대에는 무장간첩이 출몰하여 사람을 살상하는 일이 많아서 반공이념을 강화시키고 있었다. 그래서 공공장소의 벽은 물론 전봇대에 각종 표어가 붙어있었다. “때려잡자 김일성! 이룩하자 남북통일!”, “
강 경 호 (시인, 문학평론가) 내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엔 아이들이 바른 언어를 쓰도록 하기 위해 욕을 많이 하는 아이들을 학교에 일러바치는 제도가 있었다. 고무지우개에 ‘욕지’라는 도장을 파서 그 도장으로 종이에 찍었는데 그것을 아이들에게 일정량을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아이들이 욕을 하면 “욕지!” 하고 소